가정교육의 책임과 의무
글을 쓰기 전, 대한민국 교권에 계시는 많은 교사님들의 무궁한 발전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이번 서이초 교사님께서 별이 되신 사건을 바라보면서 한참 사회성숙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초등학생으로 부터 말하지 못한 괴로움 속에 힘들어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책임과 사명 의식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살피고 교육하신 큰 노고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실 바라면서 의무와 책임이 아닌 권한과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저도 함께 돕겠습니다.
“모든 교육의 시작은 가정이다. “
현대사회가 발달되면서 점점 가정 내에서 교육보다 외부에서 습득되는 교육과정에 집중되고 있고 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맡겨지는 경우가 많고 돌이 지나면 영아반에 맡겨져 보살핌을 받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30대인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5-6세가 되자 어린이집을 다녔고 그전까지는 부모님 속에서 돌봄을 받으며 자라온 세대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과정 속에서 맞벌이를 하느라 아주 어린 나이에도 따뜻한 집이 아닌 어린이집에서 대다수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분리불안이라는 주제로 한참 이슈가 되어 학교공포증이라는 진단명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가 유행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너무 어린 나이에 외부환경을 접하다 보니 부모와 떨어져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애착관계 패러다임의 변화가 확실해 보인다.
맞벌이 시대 전, 사회의 규범과 도덕 그리고 공공장소 예절은 가정 내에서 교육을 받아 외부에서 사회적으로 어긋난 행동을 아이들이 할 때면 부모님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부모들이 손가락짓을 당했었다. 그만큼 가정 내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했으며 ‘어린아이 앞에서 찬 물도 제대로 못 마신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본보기로서 의무와 책임감은 상당했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현실은 부모들은 그저 경제적인 문제부터 해결하느라 어느덧 양육보다는 당장의 수입을 먼저 생각하기에 가정 내의 교육은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기도 한다. 물론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만 가정에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쇠퇴되어 가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과거에 묻어두기만 했던 사회적인 문제들이 하나둘씩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권의 추락과 청소년의 인권”
청소년 인권이 붐이었을 때 청소년들의 외침은 항상 하나였다. 청소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을 침해하지 말라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교권을 이용하여 남용하거나 차별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약 15년 전으로 돌아가면 과거에는 영어단어 100개를 외우게 하고 외우지 못하면 외우지 못한 개수만큼 체벌을 당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르고 채점을 한 후 틀린 개수만큼 교과교사로 부터 맞아야 했으며 청소년의 의사도 반영되지 않은 채 남아서 보충공부를 해야만 집에 가야 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뺨은 고사하고 가슴, 엉덩이, 종아리, 손바닥과 발바닥 신체부위와 상관없이 일방적인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은 암기력과 시험성적이었다. 청소년 인권은 이 구타로부터 해방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야말로 교권은 강력한 무기인 시절이었다.
그리고 전교회장이나 부회장 일명 고위 간부가 되기 위해서 발전기부금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자금을 부모님이 내어주어야만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다. 전교회장이나 부회장이 되면 일명 엘리트들만 간다던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진학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학생기록부에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종영한 펜트하우스처럼 돈으로 성적을 조작하거나 시험지를 미리 빼돌리는 일이 범죄가 아니었던 것처럼 일부 교사는 명문학원에 고액을 받고 시험지를 판매하기도 했었다. 이런 범죄행위에도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늘 상위권을 유지하기도 했으며 돈 없고 가난한 학생들은 그저 교사들의 화풀이 수단으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일부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은 학생들이 샛별처럼 나타나도 그 가능성은 철저히 무시한 채 전교회장에 출마하려고 해도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채 낙화되는 아쉬운 사례가 많았다.
청소년 인권을 외치며 청소년의 권리만을 외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교사는 청소년에게 교육을 해주는 고귀한 직업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항상 존중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와 일부 교권을 악용하여 청소년 권리에 침해하는 행위를 비판하고 청소년으로서 의무를 잘 지키도록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두 가지 모두 퇴색되어 서로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며 협력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셈이다. 확실히 과거 교권의 부정부패는 많이 사라지고 청소년들의 권리를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청소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는 사라진 채 권리만을 내세우고 있고 교권에서도 청소년의 문제로 가정과 소통하는 가운데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아 이 또한 교육현장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확신한다. 저출생 국가로 앞으로 긍정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암울한 교육현장을 계속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풀어야만 하는 숙제“
누구라도 알다시피 경쟁사회로 변화하면서 교과목 성적이 중요하지 인성은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교과목 성적이 높아 수입이 높은 대학으로 진학하기 원하지 인성교육은 우선순위에서도 후순위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재학 중일 때 인성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이 시간에도 국영수사과에서 미흡한 점을 노트에 정리해서 가장 필기 많이 한 학생이 가장 높은 점수를 가져가곤 했었다. 학기 말과 같이 여유로울 때에는 수면을 취하거나 영화를 보는 형식으로 시간을 때우기도 했으며 정작 인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처럼 교과목과는 멀어져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 많은 의료인들을 보면 그 결과가 그대로 사회문제로 나타나기도 했다. 아픈 사람을 의료적으로 돕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고 공부를 하는 대신 높은 수입을 얻기 위한 과정으로 여기는 동기들이 훨씬 많았고 의료현장에서도 가난하고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로부터 등지는 현실을 목격하기도 했다. 전공책을 통해 어떻게 하면 따뜻한 의료를 제공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반면 의료기관에서는 어떻게 자본을 만들어낼까라는 공부했던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현타를 겪기도 한다.
교사와 학생이 살아남기 위해 지금 바뀌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교육현장은 암울한 정체기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육환경의 부정부패가 과거와 달리 많이 줄었고 부당한 체벌도 많이 줄었다고 생각한다. 대신 다른 차별과 인권침해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안타까운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내가 생각하는 해답은 권리와 의무를 향상해 책임감을 부여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중간지점을 찾는 것이 매우 어려운 과정이겠지만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를 설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들을 잘 수행하다 보면 권리도 당연히 지켜질 것이다. 만약 학생이라면 부모에게도 역할을 부여하도록 해서 학생들도 인식을 가지게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교사-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이 서로 존중하고 공존할 수 있는 교육현장을 꿈꿀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