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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담 하상목 Aug 23. 2023

노동, 불만족과 아주 불만족 사이

노동은 원래 즐겁지 않았다.

  ‘나는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꿈을 이루기 바빴다.’

  청소년기 시절, 땀을 흘리며 사람을 살려내는 의료인의 삶이 멋있어 보였다. 온몸에 피가 잔뜩 묻어있지만 최선을 다해 수술을 해내는 외과계열 의사와 심정지 상황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심폐소생술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마치 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기존에 꿈꾸던 장래를 포기하고 의료계열 쪽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진심을 다해 공부하고 목표를 향해 그 누구보다 노렸했었다. 목표가 생기니까 공부에 재미를 느끼기도 하고 나중에 멋진 가운을 입고 일하면서 많은 환자들을 만날 생각을 하면서 졸린 눈을 비비며 공부를 했었다. 열성을 다한 덕분에 간호학과에 입학할 정도의 성적은 충분히 되었고 앞으로 희망적인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집중했다.

  아쉽게도 내가 상상했었던 것과는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이 세상은 자본이라는 수단을 통해 가치교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너무 몰랐었다. 정성을 다해 시험을 준비하고 솔직 담백하게 세상을 살아가면 된다는 순수한 나에게는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기 마련이었다. 많은 학우들과 선의의 경쟁을 하며 서로 격려하며 의료인이라는 꿈을 꾸기에는 세상은 다소 검은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사회생활이라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할 단어로 포장해서 시험문제가 담긴 족보가 오가기도 했고 평소 수업시간에는 졸면서 시험 전날까지 음주를 해오던 복학생 형이 나보다 시험성적이 더 좋은 마법 같은 일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나는 부조리 함에도 문제를 나 자신에게 찾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잘 팔리지 않는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어.’

  나는 더 열심히 살지 못한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못해서 그리고 일상생활을 관리하지 못한 것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자책했었다. 하지만 되돌아보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었다. 전공공부와 실습을 병행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아르바이트, 방학에는 스펙을 쌓기 위한 공부와 경험 그리고 쓰리잡을 병행해 가며 그야말로 미래를 담보로 제 살과 뼈를 깎아가며 생존했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바삐 살아감에도 부족함을 느껴 더 자신에게 채찍질해 가며 더 열심히 해야 경쟁자와 합류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그 결과물로 번아웃이 찾아와 학부 3학년에는 진지하게 자퇴를 결심하기도 했었다. 한참 일상생활 없이 실습이 끝나면 수많은 컨퍼런스 준비와 시험, 그리고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시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집안형편이 넉넉한 동기가 생존이 아닌 취업에만 전념하는 모습이 때때로 부럽기도 했었다. 수많은 경쟁자 중에서도 성적이 높았던 사람은 높은 연봉을 자랑하는 BIG5에 취업하기 희망하는 동기가 더 높은 성적을 얻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진정한 의료인이 되길 희망하는 따뜻한 동기들은 성적이 중위권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교수님들의 강의는 어떻게 하면 좋은 간호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공부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줄을 세우고 잘 팔리는 간호사가 되기 위한 지도를 하기 바빴다는 증거였다. 한때 학부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다. ‘넌 시험을 위한 공부를 좀 해.’ 처음에는 이런 말이 어떠한 의미인 줄 모르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조금 지난 후에 알게 된 것은 시험에 나는 위주의 공부를 하라는 의미에서 지적사항이었다는 것이다. 즉 많은 지식으로 좋은 간호를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잘 팔리는 간호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후배 태움이란 과거에 자신의 희생을 보상받기 위한 전략이다.‘

  자본주의에 노동이란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하지 않아도 획득하는 자본의 양은 다르지 않았다. 노동이란 개인의 자유의 시간을 반납하고 자본이라는 무한한 가치교환 수단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사회초년생들에게는 뼈를 갈아서 기업에 한 몸을 바치라고 강요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자본은 노력에 미치지도 못하게 지급한다. 애초에 거래 자체가 잘 못된 것이다. 일방적으로 사회초년생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며 기업의 배를 불리는데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설계가 연차가 높은 선배들은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왜 가만히 있을까? 대부분 바뀌지 않을 것이라 단념하고 자신의 일은 최소한으로 하기 위한 꼼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때 이슈가 되었던 간호사 태움이 갑자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가 된 것은 모두 이유가 있다. 중간연차가 되면 자기가 하던 일도 귀찮아 아랫연차에게 미루고 연봉을 받는 만큼 일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덜해야만 그동안 열심히 희생해 왔던 년수와 수지가 맞기 때문이다. 일종의 거래로 치면 그동안 희생했었던 시간을 지금 하지 않음으로써 보상을 받으려는 심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가뭄에 콩 나듯 자신의 일을 철저하게 해결하며 신규연차를 도와주는 천사와 같은 선배가 있다. 아쉽게도 천사는 어떤 조직이든 빨리 떠나는 것이 늘 아쉽기만 하다. 이처럼 새로 입원하는 환자와 면담하기, 수술실로 안내하기와 수술 후에 환자 병실로 가서 간호하기, 모든 주사행위, 먹는 약 제공하기 등등 지금은 많이 구분되었지만 아직도 일부 간호업무에는 신규간호사 즉 사회초년생의 업무로만 여기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물품을 세는 일, 조별로 물품을 채우는 일, 주사제와 약물을 확인하는 일 등등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가끔 나쁜 선배를 만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물품을 숨기는 선배를 만나면 아주 아찔해지기도 한다. 그 나쁜 선배도 결국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연차가 쌓일수록 주변에서 들리는 말은 중간만 하라는 말이었고 자본이 주어지는 만큼만 노동을 하라고 했다.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자본의 합은 같았기 때문이었다. 좀 더 많은 보수를 꿈꾸며 승진을 꿈꾸더라도 오너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좌천당하기 일쑤이다. 그러니 좋은 간호사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진실된 마음만 있다면 좋은 간호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세상은 점점 내가 생각하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처음 일을 하면서 이렇게 힘든 일인 것을 알았더라면 의료인을 꿈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렇게 부조리하게 업무를 하는 것이었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과거 간호학과를 지망하던 내 손목을 끊고 싶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받는 동의서를 출력하는 업무가 왜 나의 일인지, 수술부위에서 피가 젖어 의사에게 보고하면 바쁜데 왜 전화하냐는 의사의 태도라던지, 의사를 데려오지 않는다며 호통치는 환자와 보호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이라는 족쇄에 피가 더 이상 나지 않도록 거즈를 덧대어 붕대를 감아 응급처치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집에 돌아오면 세상이 다 떠내려가듯 울었다. 그리고 눈물이 마르기 전에 자본을 얻기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수년간 반복하다 보니 제법 내공과 사회생활은 늘었지만 반대로 진정한 열정은 점점 식어만 갔다. 처음 임상간호사에 입문할 때 메르스가 창궐하였고 나는 에볼라와 메르스와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 코로나라는 센 바이러스와 대적하면서 이렇게 열심히 해보았자 나의 연봉은 그대로라는 생각이 머리를 휘감았다. 그렇다. 나도 현실의 검은색에 물이 든 것이었다. 과거 의료수급을 받는 환자에 대해서는 미세 유리의 유입을 막는 주사기와 수액세트는 쓰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돈이 되지 않는 환자라고 여기며 일반 보험이 있는 환자와는 구분되는 처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비보험이 있는 환자와 비급여 항목을 모두 감당할 수 있는 환자를 우선으로 여기며 필요도 하지 않는 검사를 하면서 환자는 곧 자본이라는 의료에게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 상 실수를 하지 않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애쓰는 나를 발견했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순수하게 환자만을 생각하며 내가 하는 행위가 선의의 의도로 여기며 이를 존중하는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나에게 주어지는 연봉과 사회적인 대우를 꿈꾸어 왔지만 이런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허상이었다. 이런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교수와 사회적인 분위기는 그저 누군가는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해야 하고 그 과정을 돈으로 만들려는 수익화 전략이었던 것이었다.


  ‘셋팅은 잘 못 되었고 돌아가기에는 늦어 버렸다.’

  업무를 해나가면서 종종 현타를 맞을 때마다 종종 나의 초심은 어떠했는가를 생각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생각하기보다 자본을 먼저 고려하는 자신을 보면서 이전과는 달라 이질감을 느낄 때가 많다.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며 자본이 주는 편리함에 대해 설교하는 어른들을 비난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고 불편한 나에게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내가 학부시절에 이런 고민을 했더라면 지금은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연봉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간호학과에 입학했다는 동기들도 아쉽게도 얼마 버티지 못해 퇴사했거나 주변에 사람들이 몇몇 남아 있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달받기도 한다. 나의 인생에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그동안 애썼던 것의 결과물이 불확실할 때이다. 실제로 꿈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말겠다는 다짐 해서 입사한 곳들 마다 이미 짜여진 틀에 나를 끼워 맞추기 바빴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아닌 자본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오너들의 계획에 따라서 나는 바삐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 계획에서 벗어나는 것을 실수와 책임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게 되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는 아찔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연봉이라는 달콤한 채찍을 휘두르며 자본을 쫒게 만드는 일상에 톱니바퀴처럼 달려야만 하는 현대판 노예가 아닐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다시 가슴이 뛰고 오로지 간호라는 행위 자체가 인정받으며 그것이 곧 업무로 측정되어 연봉을 받길 희망했다. 하지만 시도를 하면 할수록 나는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없을뿐더러 나는 이미 현대판 노예에 익숙해져 감정 따위는 이 세상에 필요 없는 부산물처럼 여기는 나 자신으로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감정을 느끼지 않으니 살기가 훨씬 편해졌다. 단 살리고 말겠다는 감정이 요동칠지라도 희망과 만족을 느끼는 행복도 같이 사라져 버려서 재미가 휘발해 버렸다. 어쩌면 그 감동을 다시 쫒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끝없는 좌절로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고 현실에 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동은 만족이란 없다.’

  나름 오랜 시간 노동에 대해 생각한 결과물이다. 노동은 나의 시간을 할애해서 자본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원래 고통이라는 것이 뒤 따른다는 것이다. 노동이라는 행위로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해야만 하는 업무가 발생하고 그 일을 수행하는 자체가 힘이 들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만약 고통스럽지 않고 싶다면 노동을 멈추면 된다는 아주 간편한 공식이 있다. 하지만 멈추게 되는 순간 나는 전기를 직접 생산해 낼 수 없고 깨끗한 물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식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식자재와 물품이 없었다. 그래서 자본이라는 무한한 가치교환 수단을 통해 이들을 얻고 나름대로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자체가 만족과 불만족으로 따지자면 불만족에 가까웠다. 많은 불편함을 감수하며 만족함을 느끼기에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나의 생존권부터 해서 인간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까지도 말이다. 이 중에서 하나라도 만족이 되지 못한다면 세상과 단절되기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되고 한번 놓은 끈을 쥘 때까지는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할애되었다. 사람들은 그 끈을 놓지 않으려 오늘도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기꺼이 해야 하는 일들을 하지만 집에 돌아올 때 가려진 가면을 벗으며 자신을 만나는 순간 괴로워 발버둥 친다. 원래 만족이라는 것은 없고 오로지 그 과정 속에는 불만족과 아주 불만족 사이에서 결정되는 잣대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노동을 통해 만족스러운 가치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이제부터라도 꿈 깨자. 하지만 묵묵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만 하자. 나도 당신도 오늘을 살아가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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