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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상목 Sep 02. 2023

수치심, 나는 잘 못한 것이 없는데?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제안이 아닌 수치심으로 받아들이는 나

  ‘오늘도 화가 난다.’

  나는 왜 오늘도 화가 나는 걸까?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수없이 반복했지만 답은 그리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화가 날 때가 많았다. 화날 일이 아닌데 도대체 화가 나는 것에 대해서 아프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없이 상담을 받기도 했고 휴식을 취해보기도 했는데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화가 난 이유들에 대해 상황을 분석하고 일차적인 감정을 만날 때마다 더 예민해지기도 했다. 차분하게 한숨을 쉬어보기도 하고 명상을 통해서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토록 화를 내는 자아를 찾으려고 하니 때때로 우울해지거나 해결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곤 했었다. 다행히도 몇 시간이나 하루가 지나면 자연스레 화가 지나갔지만 한번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는 나의 습관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느끼는 감정과 만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될까라는 두려움과 벌거숭이가 된 것 마냥 수치심’

   그동안 분노하는 나를 만나면서 그리고 주변에 사람들을 관찰하며 느낀 점은 상당히 비슷했다. 완벽주의가 강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참 바쁘게도 살아간다.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두려움과 수치심이라는 일차감정을 만들고 그것들은 의도와는 다르게 인식하여 이차로 분노라는 행동을 만들었다. 나는 주로 인간관계에서 자주 화가 났는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들의 제안이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어떠한 일을 할 때 이미 정리정돈과 시간적 배치가 끝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지만 더 좋거나 효율적인 방법들을 제안하거나 수정하고자 하지만 최선을 다해 이미 완벽한 일을 왜 그르칠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의심을 한 것은 아닐까? 혹은 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것들을 하지 않았을 때 잘 못 되면 어떡할까? 라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쉽게 불안해지고 예민해진 나는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된 것 마냥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능력하다고 판단하면 어떡할까 라며 나의 정체를 들킨 것 마냥 수치심을 느꼈다.

얼굴이 붉어지고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듯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내 행동은 의견을 제시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도 상대방도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한 일들이지만 제안이나 의견에 내가 실수했다고 느끼고 쓸데없는 과도한 책임감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다해놓은 밥에 숟가락을 얹지려고 하는 양심의 가책이 없는 사람의 경우는 예외이다.


  ‘너도 그러잖아?’

  나의 분노의 원천인 두려움과 수치심을 깨닫게 되면서 주변사람들은 어떠한지 관찰하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 의외로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다른 사람들의 제안이나 의견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과 감정 소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이 아닌 감정이 먼저 이입되면서 맞건 틀리건 간에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부터 하고 그다음에 건설적인 방향으로 갈 수가 있었다. 그리고 감정적인 것을 대화로 해결하고 푸는데 까지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렸고 자칫 감정적인 부분을 해소하지 못할 경우 조직 갈등이 되거나 최악의 경우에 아예 인연이 끊어져 버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함께 하는 목적은 더 나은 방법을 찾고 더 좋은 것을 찾기 위해 한 공간에 모이거나 대화를 시도하지만 일차적인 감정 때문에 성과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만 상한다는 것에 아주 놀라웠다. 이런 현상은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아주 가까운 가족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만 유난하게 화를 빽빽 내며 자존감이 상했다며 위로를 받거나 술을 들이켜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만 그랬더라면 정말 자괴감이 들어서 사회생활을 못하는 부적응자로 생각하여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서로 경쟁하는 사회가 만든 부작용’

  어쩌면 서로를 의심하고 스스로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 마냥 행동하는 것과 그것에 지적질을 당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회에서 강요하는 경쟁사회와 교육문화에서 나타난 것들이 아닌가 생각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었을 때를 되돌아보면 시험이 끝나고 복도에서 시험지를 채점하며 선택한 답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일종의 시험기간 동안 문화였다. 선생님들은 그다음 과목을 공부하라고 했지만 친구들끼리 답들을 서로 맞다며 우기거나 정답이 무엇인지 책을 찾아보며 자존심 상한 것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친구가 말한 답이 맞을 때에 그렇게 수치심이 들고 비참할 수가 없었는데 이 전쟁 같은 감정들은 시험이 끝나고도 잘 해소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학기가 시작할 때 말 한마디를 건낼 정도 였으니 말이다. 일명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 태클을 거는 것이 싫고 주장하는 것을 따라주기 바라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때에는 이마가 찌푸려지는 것은 아마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교육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육은 서로 사회에서 그저 줄 세우기 잘못된 경쟁을 부축인 것에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스트레스의 두 가지 길, 회피와 도전‘

  그동안 정리되지 않았던 생각들을 쭉 나열해 보니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정신건강 간호학과 심리학 전공과목에서 배운 스트레스 대처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반응으로 도망가려는 회피반응과 맞서 싸우려는 도전반응이라는 두 가지 반응이 있는데 사람마다 어떤 방어기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반응은 동물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밥을 먹고 있는 동물이 그것을 빼앗아 먹으려는 다른 동물이 나타났을 때 나보다 더 위협적이라면 당연히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밥을 포기하고 열심히 도망을 가게 된다. 하지만 빼앗아 먹으려는 동물이 나보다 덜 위협적으로 판단되면 먹이를 빼앗기지 않으려 맞서 싸우는 것과 같다. 인간도 동물적인 본능이 있기에 당연한 듯하면서도 신기한 점은 일차적인 감정인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낄 때에도 스트레스 상황으로 여긴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단순히 생존이 아닌 같이 잘되길 바라자는 상황에서도 이런 메커니즘이 발동된다는 느낌에서이다.


  ‘관심 끄고 나에게 오로지 집중하기’

  최근 자주 사용하고 있는 방법인데, 아예 관심 자체를 끊어 버리고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것들을 느끼고 있는지 집중하는 것이다. 일명 알아차림이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나는 사실에서 벗어난 주제나 상대방 행동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스스로 격리해버리곤 한다. 도피현상이라고도 여길 수 있는데 무작정 화부터 나는 도전반응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느껴졌다. 상대방이 느끼는 감성에 너무 젖어들지 않아서 좋았고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좀 더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사실 나는 목적이 있어야  타인과 잘 어울리는 편인데 감정과 분리하니 요즘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스스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내가 어떤 상황인지 되돌아보게 되어서 정말 좋았다.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아파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챙김을 잊고 살도록 만드는 문제가 있는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와 만나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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