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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몬드 Mar 08. 2022

[ep1] 내 눈치를 살피는 상사의 비열함이 역겨웠다

PTSD의 시작

그 날은 내가 회사에 들어온지 한 달 정도 되는 날이었다. 내가 근무하던 곳은 마침 3월 피어나는 꽃과 나무들로 산책로가 아름답게 우거진 교육기관이었다. 초봄의 스산함에 옷깃을 여미며 막 출근해 업무를 처리하던 아침이었다.


업무를 처리하던 중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네 담당자 하몬드입니다."

각 부서의 홈페이지 구축과 관련한 업무를 맡고 있던 나를 찾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십번은 걸려왔다.

오늘도 다르지 않을 터였다.


"선생님..?"

"네네"

"저 R팀장 인데요. 혹시 지금 A 부장 거기 갔어요? "

다급하고 안타까운 목소리.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 A부장이 누군지도, 얼굴도 모르는 나는 급히 눈으로 사무실을 훑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없다.

"아뇨 R팀장님, 지금 여기 들어오신 분은 없으세요."

"하선생님 지금 제 말 잘 들으세요. 지금 A부장이 거기 갈텐데 너무 놀라지 말아요.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뚜뚜.. "수화기의 말이 아직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복도 끝에서부터 성난 목소리로 울리는 고함이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그러니까 담당자가 누구냐고! 이따위로 일한 담당자 말이야!"

누군가 사채라도 쓴 줄 알았다. 직장생활하면서 이런 데시벨의 고함은 처음이다.

복도에 줄지어 있는 사무실이란 사무실은 들어가 고함을 내지르고 불만을 토하는 모양이었다.

얼굴에 독선과 아집이 덕지덕지 붙은 채 화를 주체하지 못해 살기 어린 눈으로 쏘아보던 가해자 A를 그날 처음 보았다.


"담당자 누구야 당장 나와! "

사무실 내 C 팀장이 그를 보자마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군대 상사에게 경례를 하듯 굽신거린다.

 " A부장님 오셨습니까"


"홈페이지 담당자가 누구냐고! "

화를 삭히지 못해 문에서부터 씩씩 거리는 A부장에게서 위험을 감지했는지 나와 같은 팀의 K가 나선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옆 테이블에서 내 자리로 저벅저벅 한걸음 한걸음 A가 가까워졌다. 두리번 거리던 그의 시선이 내게서 멈췄다.

"홈페이지 담당자야?"

"네 접니다. 실례지만 무슨 일로 그러실까요?"

"계약 제대로 이행이 됐는지 확인했어 안했어! "

"어떤 계약 말씀이실까요? 그리고 누구신지.."

"홈페이지 계약말이야! 당장 계약서 가지고와!!!"

윽박지르는 고성에 정신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이사람은 누구이며 이렇게 왜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건지 황당해할 시간도 없었다.


성난 얼굴의 60대 남성이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벽쪽으로 나를 밀치며 위협을 가하는 중이었다.

"제가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 전임자가 처리한 건은 정확히 모릅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희 팀장님과 말씀을.."

"그러니까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


엄연한 폭력이었다. 팀장은 마침 자리를 비웠는데 이럴때 왜 자리에 없는 건지 야속하기만 했다.

A는 지금 당장 계약서를 내놓으라며, 지금 찾아내라며 생떼를 쓰는 중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굽신거리지 않는 내가 더 못마땅한 듯 했다.

K가 여기 저기 파일 더미를 뒤적이며 찾는 시늉을 했다.


그때 마침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눈짓으로 팀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팀장님 지금 이분이 오셨는데 한번 말씀을 나눠보시는게.."

팀장과 A는 일면식이 있는 듯 했다.

"아이고 A 부장님 오셨습니까. 무슨일 있으십니까" 깍듯이 인사하는 팀장.

"팀장님이야 이제 부임했으니 말해도 모르지뭐."

"하하 그건 그렇죠 뭐."

나보다 한달 먼저 팀에 합류해 나만큼이나 팀의 업무에 대해 무지한 팀장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하하 그럼 저는 잠시 일이.. 하더니 다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사무실에서 본인 팀의 팀원이 애처롭게 알지도 못하는 인간에게서 위협을 받고 있는데 실실거리며 자리를 피한다. 분명히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인간이 평소 어떤 평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불만을 어떤 식으로 해소하며 얼마나 자주 폭력적인 언사를 행사해왔는지.

잘못 대응할 경우 자신이 얼마나 난처해질지까지 짧은 순간 계산했을 터다.


A는 내자리에서 나도 잘 모르는 서류더미를 찾아 이리저리 헤집어 펼쳐놓더니 마구 어질러놓았다.

"이게 이딴식으로 돈을 주는게 말이되냐고!"

화가 나다가 더이상 대꾸할 동력을 잃었다. 내 속에서 뭔가 탁하고 풀리더니 더이상 대꾸를 할 의욕이 사라졌다. 갑작스런 이 미친 놈보다 지금 나의 팀장이 팀원인 나를 버리고 비열하게 나가버렸다는 게 설명할 수 없이 좌절스러웠다.


그리고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충격적이라 내가 스스로 기억을 삭제해버린건지도 모른다.

A가 서류를 내동댕이 친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이후에 내가 어떤 대응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A는 자리를 떠났고 이윽고 팀장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와 앉아있다.

그리고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망연자실해 있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파티션 너머로 훌쩍 과자 하나를 내민다.

"아이고 하선생 고생이 많죠. 이거 먹고 하세요."


분명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피한 건 순간의 위기가 아니라 책임이었다는 사실을. 부임한지 얼마 안된 나는 팀장이지만,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무결하고 무지하다. 그래서 앞으로도 쭉 모를 것이다. 나에게 불리한 순간에는 언제든 얼마든지 모르는 척, 모른 척 할 것이다 라는 태도. 혹시나 싶어 내 눈치를 살피는 상급자의 비열함이 역겨웠다.


앞으로도 그는 나를 버릴 것이다. 그가 힘없고 성실한 여자 직원 뒤에 숨어 언제든, 얼마든 필요한 순간마다 나를 버릴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탁.


파티션 안쪽으로 내미는 그의 손에 들린 과자를 힘 없이 내 손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책상에 툭 던져버렸다. 꼭 보았기를 바라면서.

내 경멸의 눈빛도 꼭 읽었기를 바라면서.


직감적으로 A와의 악연이 오늘이 끝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만둘까..?


입사 전 기재된 업무와 동떨어진 업무를 수행하며 성장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실망스럽던 한 달이었다. 지금 오퍼가 들어온 다른 회사를 택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에이 그래도 회사에서 더 무슨일이 있겠어. 잠시 불편한 거 참으면 그만이야.

내 머리속에 잠시나마 퇴사라는 단어가 맴돌았지만 이내 마음 깊은 곳에 구겨 접어 넣었다. 과민반응하지말자..


그리고.. 이후 2년 내내 이날 퇴사하지 않은 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두고두고 후회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내리지 않은 것을.  


애써 위험을, 불편을, 외면한 나의 선택을. 그 날 펼쳐진 악연의 책장을 곧장 덮어버리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그 날이 바로 끝없는 심연으로의 추락,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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