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휴식 습관
무언가 시작하기 직전에는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머리도 잡념으로 가득 차있다. 근데 이런 마음과 머리의 변화는 나의 없던 에너지만 앗아갈 뿐 내 코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챕터로 도약하기 위해서 나는 늘 책을 쌓아두고 읽곤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생긴 이 버릇은 내 인생의 큰 변화가 있을 때마다 습관처럼 내게 찾아왔다. 학창 시절에도 방학 때마다 책을 찾았고, 취업을 앞둔 대학교 3학년 때에도 책을 읽기 위해 1년 휴학했었고(그렇다고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직을 앞둔 몇 달의 시기에도 항상 책을 읽는 기간을 두었다.
그리고 지금! 우주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고 30대 중반의 진로 고민이 시작된 이 시점에도 늘 그렇듯 나는 책으로 먼저 도망치기로 했다. 예전에는 동네의 가장 큰 서점에 가서 한 번에 많은 책을 샀었는데 이번에는 작은 책방들에서 한 두 개씩 드래곤볼 모으듯 사기로 결심했다. 나 참참, 우주를 낳고 제대로 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음으로 버스를 타고 멀리 있는 작은 책방들을 다니는 것을 여행이라 생각하겠다.
주소: 경기 화성시 동탄영천로 108-10 1층 상가 8호
동탄 신도시에 위치한 이 책방을 가장 먼저 들린 이유는 가장 먼저 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10시에 여는 독립서점이 주변에 없었다. 그래서 우주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바로 올 수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했다. 신도시 속에 위치해서인지 아파트숲 상가에서 발견했다. 너무 급한 걸음으로 와서인지 역시나 내가 첫 손님인 것 같았다. 이 책방의 첫 이미지는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는 거였다.
이곳은 책들도 다양하고 일단 내 취향의 책이 꽤 많았다. 고심 끝에 이곳에서는 이승우의 <모르는 사람들>을 구매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의 심리를 미분해서 하나하나 글로 풀어내는 문체를 좋아하는데 이승우 작가님이 딱 그랬다. 나는 이 책이 좋아서 이번 버스 책방 투어에서 카페인 서점을 갈 때마다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틀 간의 여행의 끝에 드디어 다 읽었는데 꼭 이 작가님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했음.
아까 갈피 책방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고 했는데 그건 이 공간이 사장님을 닮아서인가 보다. 내가 주춤주춤 앉아 책을 읽자 사장님은 가사가 있는 잔잔한 배경음악에서 가사가 없는 연주 음악으로 바꿔주셨다. 그리고 초코라테를 시킨 나에게 딸기도 먹어보라며 잘라 주셨다. "입에 맞지 않으면 드시지 않아도 돼요!"라는 따뜻한 말과 함께. 배려를 받지 않아도 별 신경은 안 쓰지만 이런 섬세한 배려가 있으면 꼭 눈치채고 마음에 새기는 편이다. 나는 이곳에 꼭 다시 올 거다.
주소: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세권로316번길 49
갈피책방에서 나와서 버스를 꽤 오랫동안 타고 도착한 이곳. 내가 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 같은, 시간이 담겨있는 정겨운 동네의 상가 건물 2층에 위치해 있었다. 햇살이 큰 창을 통해 들어와서인지 노란 따듯함이 감도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예술 분야의 책들이 많았는데 예술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아하고 동경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곳이었다. 그렇게 오래오래 책을 고르다가 세 권을 샀다. 막상스 페르민의 <꿀벌 키우는 사람>이라는 소설과 장 주네의 <렘브란트> 그리고 윤원화의 <껍질 이야기>.
사실 이곳에서 재밌어 보이는 소설책들이 많아 고민했는데 <꿀벌 키우는 사람>은 제목이 유난히 끌렸다. 우주랑 곤충에 대해 이야기해선가.. 무의식의 세계란... 장 주네는 <자코메티의 아뜰리에>를 재밌게 읽었어서 고민 없이 집었다. 짧고 생각을 많이 하게 했던 책으로 기억하는데 또 그런 책 좋아하는 나.
마지막 <껍질 이야기>는 일단 표지가 너무 이뻤다. 근데 비닐로 싸여있어서 첫 문단을 읽어 볼 수는 없어서 고민이 되었다. 사장님께 혹시나 이 책이 너무 어렵냐고 여쭤봤는데, 사장님이 소장하고 계셨던 이탈로 칼비노의 <모든 우주만화>라는 책을 건네주시며 앞 쪽을 읽어보라고 권해주셨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껍질 이야기>의 시작이 된 이야기라고 하셨나..? 그랬던 것 같다. 책을 이렇게 멋지게 설명해 주시다니 책을 정말 사랑하시구나 했는데 나중에 검색해서 알게 되었는데 사장님이 작가님이었다! 작가님이 주신 책의 앞 쪽을 읽는데 오 재밌는데? 샀다. 다 읽고 흥미로우면 이탈로 칼비노의 책도 꼭 읽어봐야지.
사장님께 책방 투어를 하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책방 책자를 주셨다. 경기도에 있는 책방들이 나열된 책자였는데 나는 아직 갈 곳이 많구나 싶었다.
마그앤그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른책방이 있다. 근데 내가 간 날은 쉬는 날이었다. 독립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많고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고 해서 너무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근데 가게가 닫힌 모습도 이뻐서 찍어보았음. 여기 시그니처 커피가 귀엽고 맛있다는데 다음에 꼭 와야지.
주소: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매여울로40번길 42-2 1층
고백하건대 피곤해서 버스가 아닌 택시를 타고 가야 했던 '그런 의미에서'. (명색이 버스투어에 택시라니 이상하게 자존심 상하지만 일단 살고 봅니도.) 그런데 택시를 타고 내렸는데 책방이 없는 거다. 몇 번 어리바리 돌아다니다가 찾음! 낮은 가게들이 이어진 골목에 숨어있다. 드라이 클리닝 하던 곳이었는지 간판은 떨어진 자음, 모음의 간판이라 귀여웠다. 책은 두 개의 벽면에 나눠있고 두 면이 모두 예뻤는데 손님들이 있어 한 면 밖에 못 찍었다. 사실 내가 사진 찍은 벽면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이 더 많기는 했다.
사장님(작가님)이 엄청 친절하셨는데 음료를 마실 때, 그리고 책을 살 때마다의 이벤트(?)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구매했는데, 책을 사면 엽서를 한 장씩 주신다고 했다. 그리고 티를 마시고 있는데 펜과 메모장을 주시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는 손님들이 필사하거나 낙서할 수 있게 주신다고 했다. 사실 요즘에야 책에서 잊기 싫은 문장들은 핸드폰에 끄적이는 편이지만, 대학생 때까지는 항상 노트에 필사를 했었다. 주신 메모장에 처음에 들린 갈피책방에서 산 <모르는 사람들>에서 좋아했던 문장들을 적어 책갈피로 썼다. 이런 귀여운 추억이 생기다니 여행의 묘미다.
그다음 날은 행궁동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한 시간은 버스를 타야 하는 곳이지만 작은 책방이 많아 가볼 만하다 생각했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딱따구리 책방이라는 곳이었는데 분명 10시에 오픈한다고 네이버에서는 그랬는데, 닫혀있었다. 너무 아쉬웠지만 역시나 책방 앞만 봐도 기분이 좋아졌다.
딱따구리 간판 아래에는 A4용지에 ' Take what you need'이라고 쓰여있고 'Love'를 뜯어갈 수 있게 붙여 두었다. 걸어다가 사랑받기 기분 좋네.
또 다른 닫힌 책방 팩토리공공공. 열린 줄 알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는 딜에 '계단이 많아서 죄송합니다.'라고 고 쓰여있어서 웃음이 났다. 근데 문이 닫혀있었다! 아쉽지만 이곳도 다음 기회에..
주소: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32번길 21-10 2층
닫힌 책방과 닫힌 수원시립미술관을 지나 드디어 열린 곳. 아니 사실 한시에 오픈이어서 바로 옆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다가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후다닥 들어갔다. 근데 그러길 잘했다. 정말 모든 책이 다 읽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아주 오래 이곳저곳 살펴봤다. 입구 쪽에는 키링이나 스마트톡, 엽서 등 귀여운 스테이셔너리를 판매했는데 정말 눈 돌아갈 만큼 귀엽다.
이곳 다음으로 '책쾌'라는 서점과 중고서점도 들러야 해서 최소한으로 사야 했기에 두 권만 집었다. 내가 구매한 책은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 토베 얀손의 <페어플레이>였다. 버지니아 울프, 슈테판 츠바이크, 박완서의 책도 너무 데리고 오고 싶었으나 결국 읽어보지 못한 작가의 책을 집었다. 근데 책쾌가 닫았다..... 그냥 몇 권 더 살걸... 너무너무 아쉬워....
아, 그리고 브로콜리 숲 사장님 너무 귀여우시다. 볼이 발그레하셔서 너무나도 귀여운 목소리로 책 계산을 도와주셨다. 대화를 길게 한 것도 아닌데 사람이 갑자기 훅 좋아질 수 있구나 싶었다. 생각보다는 길게 책을 싸주시길래 구경을 더 할 수 있어서 좋다 생각했는데, 받은 걸 보니 이래서 시간이 걸렸구나 싶었다. 사장님을 닮아 너무 귀여워..! 서 "헉 너무 귀여워요!"라고 말해버렸다.
그렇게 내 여정으로 산 책은 11권이다. 사실 작은 책방 여행 전에 동네에서 큰 서점에서 4권을 홀린 듯이 사버려서다. 큰 서점은 남편과 우주랑 같이 갔는데, 아이와 함께 책을 고르니 마음이 너무 급했다. 후 늘 마음은 나보다 급하다. 그래도 나름 마음에 드는 책을 샀더랬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구달의 <한 달의 길이>, 안리타의 <쓸 수 없는 문장들>, 아도니스의 <너의 낯섦은 나의 낯섦>!
어제 여행이 끝나고 다 읽은 책은 아직 두 권뿐이다. 아까 언급한 이승우의 <모르는 사람들>과 구달의 의 <한 달의 길이>. 같은 백수 시기라 그런지 구달님의 글도 유독 와닿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지만 많은 것을 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나에게 구달님이 "너 혼자만 그런 거 아냐~"라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구달님의 문장들이 재밌어서 그 위로가 더 힘이 있었다.
이제부터는 내 여행의 사진들>>>>
그럼 이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