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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승민 Jan 26. 2018

'좀비기업'도 지원해야 할까

축구의 홈그로운 제도와 중소기업 지원 정책


영국의 프로축구리그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는 ‘홈 그로운(Home Grown)’이라는 제도가 있다. 유소년 시절을 잉글랜드 팀에서 보낸 선수를 의무적으로 팀 명단에 포함해야 하는 조항이다. 성인 선수가 되기 전에 잉글랜드(또는 웨일스)에서 일정 기간 이상 훈련받으면 홈그로운으로 친다. 국적 제한은 없다. 출신지와 상관없이 ‘잉글랜드에서 성장한 선수는 잉글랜드 선수로 본다’는 식이다. 


왜 이런 제도를 만들었을까. 홈그로운은 유소년 육성을 위한 정책이다. 규정에 맞추기 위해 각 구단이 취할 수 있는 대응은 크게 두 가지다. 홈그로운 선수를 영입하거나, 향후 홈그로운이 될 수 있는 유소년 선수를 키우는 것이다. 키워놓은 홈그로운이 다른 팀으로 이적하면 손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규정치를 채우기 위한 영입 경쟁 때문에 홈그로운 선수는 몸 값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향후 이적 때 비싸게 팔 수 있다. 


설령 규정을 못 맞추는 팀이 있어도 목표 자체가 흔들리진 않는다. 예외규정의 묘미가 발휘돼서다. 규정에 따르면 유소년 선수는 팀 명단에 등록되지 않았더라도 1군 팀 경기에 뛸 수 있다. 구단들은 부족한 명단을 메우기 위해 유소년 선수를 경기에 기용한다. 홈그로운을 채우든 못 채우든 결과적으로는 유소년 선수의 활용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축구계 유소년 정책을 국가의 중소기업·창업 육성책으로 보면 어떨까. 국가를 하나의 리그, 국가 내 산업은 각 구단, 기업은 선수로 빗댄다면, 대규모 글로벌 기업은 베테랑 스타 선수, 창업 초기의 중소기업은 유소년 선수 정도로 볼 수 있다. 또 로스터 제도의 25인 제한처럼 각 산업에는 시장 규모가 있다. 한정된 로스터 자리를 두고 각 팀에서 치열한 주전 경쟁을 하듯이, 기업들은 시장의 파이를 두고 경쟁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주전 경쟁은 당연히 유소년 선수보다 경험 많은 베테랑 선수에게 유리하다. 사실 리그 입장에서도 당장은 실력 있는 베테랑 선수가 있는 게 좋다. 각 선수(기업)의 실력은 팀(산업)의 역량이고 이런 팀들이 모여 리그(국가 경제)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베테랑 선수의 영입은 짧은 시간에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다. 때로는 해외에서 거물급 선수를 영입하기 쉽도록 장벽을 낮추기도 한다. 자국 경제 활성화를 위해 낮은 세금으로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거나, 기업 친화적인 정책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리그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유소년 선수의 성장도 필요하다. 지나치게 베테랑 선수에게만 의존하다가 그가 늙거나, 다치거나, 이적하기라도 하면 타격이 크다. 뒤가 없다. 팀에게도, 리그에게도 마찬가지다. 삼성과 현대차 등 대기업이 삐걱거릴 때마다 한국 경제 전체가 흔들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따라서 미리 유소년 선수를 키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려면 유소년의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 쟁쟁한 선배들 틈바구니에서 기회를 갖긴 쉽지 않지만, 기회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이 때문에 리그와 각 팀은 유소년 경기 출전에 대한 각종 혜택을 줘 그들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선배들의 양보를 얻어내야 하지만, 이는 팀과 리그 스스로의 장기적인 생존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다만, 어린 선수를 언제까지고 온실 속에서만 키울 수는 없다. 유소년 선수만 있는 팀은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 또 베테랑 선수의 활약을 통한 팀 자체의 수준 향상, 베테랑 선수의 적절한 지도, 경쟁에서 오는 긴장감이 없다면 유소년의 성장은 오히려 더뎌진다. 미래를 버린 현재는 위험하지만, 현재를 버린 미래는 공염불이다.


중소기업·창업 지원 정책의 맹점도 이런 것이다. 규모가 작을수록 혜택은 늘리고 규제는 줄이다 보니, 계속된 지원을 받기 위해 성장을 기피하는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이 나타난다. 자생력 없이 지원으로만 연명하는 악성 소기업의 증가도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대기업의 갑질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게 가능한 것은 기술력이 비슷한 중소기업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어떤 리그에서 유소년 선수에게 20경기 이상의 출전을 보장하기로 했다고 치자. 그런데 유소년의 기준이 나이가 아니라 실력이다. 실력이 늘지 않아야 출전이 보장된다면 선수들은 굳이 연습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곳 으로의 이적이나 은퇴 등 자연도태도 적다. 갈수록 선수단의 규모는 커져 이렇게 남은 낮은 실력의 선수가 20명에서 100명으로 증가한다. 보장된 20경기의 출전 시간을 100명이 나눠 가지면서 출전 경험도 줄고 실력 향상도 더뎌지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리그와 구단에서 유소년을 키우는 이유는 유소년 선수가 많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이들을 베테랑 선수로 만들기 위해서다. 베테랑이 된 유소년이 지금의 베테랑 선수와 시너지 효과를 만들기도, 이들의 자리를 대체하기도 하면서 팀과 리그가 발전한다. 성장할 잠재력과 의지가 없는 유소년 선수는 구단에 부담을 줄 뿐이다. 중소기업과 국가 경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런 측면에서 홈그로운은 치밀하게 짜인 제도다. 유소년 선수는 당장은 혜택을 받는다. 단 이들도 시간이 지나 성인 선수가 되면 자연스럽게 무한경쟁에 노출된다. 유소년 딱지를 떼고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보호막 아래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성인 선수와도 겨룰 만한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 


홈그로운은 적어도 유소년 시절 동안만은 성인 선수의 빈 주먹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지원하고 보호해준다. 다만, 성인 선수와의 경쟁에서는 지원이라는 갑옷을 입지만, 똑같은 지원을 받는 유소년 사이의 경쟁은 맨몸으로 부딪치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성인 선수와도 겨룰 수 있는 튼튼한 몸을 만들고, 또 경쟁력이 없는 이는 도태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홈그로운을 정부 정책이 적용시키면 이런 방식일 듯하다.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기준을 '작은 기업'이 아니라 '신생 기업'으로 삼는다. 일종의 일몰제다. 규모와 관계없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부지원을 졸업한다. 각 신생기업은 그 안에 정부지원 없이도 성장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규모'는 사업자가 통제 가능한 요소지만 시간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다. 기업의 모럴해저드나 피터팬 증후군을 방지할 수 있다. 


아쉽지만 지원이 없으면 버티지 못하는 기업까지 정부가 책임질 수는 없다. 그 이후는 시장에 맡길 수밖에. 오히려 어떤 회사가 유망기업인지 정부의 판단하는 게 더 미덥지 못하다. 물론 여기에는 디테일이 필요하다. 산업마다 신생기업이 자생력을 갖추기 위한 최소기간이 다를 수 있다. 제도를 악용해 기업의 설립과 폐업을 반복하는 부작용을 막을 장치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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