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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승민 Apr 01. 2019

저 꼰대는 왜 꼰대가 됐을까

안물안궁과 꼰대


"은근히 꼰대 같은 구석이 있어."

어느날 아내가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내가 왜 꼰대냐'며 발끈하게 되더군요. 서로 평소에 워낙 장난을 많이 치는 사이라 웬만한 조롱이나 무시, 멸시, 괄시, 등한시에는 무뎌져 있는데도 꼰대라는 말만은 이상하리만치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억지로라도 제 스스로 '생각이 젊은 사람' 내지는 '깨어 있는 지성인'이고 싶은 마음에 꼰대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모양입니다. 


이게 저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꼰대’라는 말은 어느 샌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비판과 기피 대상 1순위가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힘든 학교·회사 생활의 원흉이고, 사회적으로는 창조와 혁신을 저해하는 '적폐'의 중추 세력으로 꼽힙니다. 그러면서 이제 모든 사람들이 꼰대를 싫어함과 동시에 자신은 꼰대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죠. 인터넷에 꼰대 자가 진단 테스트,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한 지침 등이 돌 정도입니다. 


꼰대가 대체 뭐길래 그럴까요. 국어사전이나 위키백과를 보면 과거 꼰대라는 말은 주로 청소년들 사이에서 아버지나 선생님을 부를 때 쓰는 은어였습니다. 이것이 점점 젋게 쓰이면서 40~50대의 남성을 일컫다가, 지금은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이자 시대를 따라오지 못하는 꽉 막힌 사람 모두를 뜻한다고 합니다. 애초에 아버지나 선생님이 갖고 있던 40~50대 남성의 이미지나 특징이 확장되면서 지금과 같은 의미가 굳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처음 의미와 달리 이제는 꼰대가 가리키는 사람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젋은 꼰대'도 언론을 통해 사회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얼마 전 모교의 행사에서 대학교 신입생들과 얘기를 나눌 자리가 있었습니다. 갓 대학생활을 시작한 이들도 고작 1~2년 선배가 어설프게 군대 흉내를 내면서 '똥군기'를 잡거나, “이건 맞고 저건 틀리지” “사회생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며 '훈수질'을 한다고 진절머리를 내더군요.  


종합해보면, 꼰대는 이제 특정한 나이대나 계층이 아니라 어떤 가치관이나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보입니다. 누군가 '청춘은 인생의 특정 시기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나 정신 상태'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요. 꼰대도 이와 방식의 개념이 된 셈이죠. 나이와 상관 없이 융통성이 없고 시대 변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옛날 업무 방식만 고집하는 태도, 권위적이고 구태의연한 가치관, 자신의 생각만 진리라고 믿는 사고 등이 꼰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힙니다. 


조금 더 피부로 와닿는 증후들을 볼까요. 보통 꼰대들은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이에게는 모든 방면에서 내가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어떤 전문직 종사자들도 꼰대와 함께 있으면 가르침을 받아야 하죠. 의사 앞에서도 의학지식을 늘어놓는 식입니다. 당사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 없습니다. 가르치는 꼰대가 그 분야의 전문가인지 아닌지도 문제가 되지 않죠. 꼰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도 여기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런 특징들에 착안해서, 꼰대 판별법을 한 번 생각해 봤습니다. 키워드는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함', 이른바 '안물안궁'입니다. 일단 꼰대는 본인이 질문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사회 생활의 진리를 다 깨우쳤고, 어떤 것이든 내가 더 잘 아는데 궁금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한 번 유심히 보세요. 평소 꼰대 같았던 그는 대화 중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는지. 기껏 나오는 질문이라봐야 "애인 있어?" "아기 안 가져?" 같은, 맥락에 따라선 사생활 침해나 언어 폭력에 가까운, 호구조사 정도일 겁니다. 질문의 수준이나 진정성은 둘째 치더라도 빈도 자체도 많지 않은 게 일반적입니다.


아주 간혹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후배들이 '리스펙'하는 선배 기자가 있습니다. 한 번은 의식적으로 그의 대화법을 살펴본적이 있는데요. 이 선배는 말의 대부분을 질문에 할애하는 습관이 있더군요. "네 동기 A는 고민하던 거 잘 해결됐나?" "책은 많이 팔렸어?" "넌 왜 그 문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니?" "회사에 대해서 더 궁금한 건 없고?" 같은 것들이죠. 이 선배를 만나면 제 얘기만 하다 끝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상사 특유의 조언은 가미되곤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의 거부감은 질문 없던 꼰대와는 차이가 큽니다. 뒤집어 보면 우리는 질문 없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꼰대스러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나마 '묻지 않는 꼰대' 정도면 낫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질문이 없는 건 꼰대만의 특징은 아니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꼰대의 진짜 증거는 반대로 상대방이 안물안궁일 때 나옵니다. 묻지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은데 가르쳐려 드는 경우죠. 나는 그에게 처세술의 노하우나 인생의 'A to Z'를 가르쳐달라 한 적 없는데 장황설을 늘어놓거나, 그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데 자신의 무용담을 줄줄 풀어내는 게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입니다.


꼰대들은 '요즘 것'들이 왜 자신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 한다며 답답해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궁금하지 않아서죠.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를 만나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갑자기 길에서 말을 걸더니 내 관상과 우주의 기운을 설명해줍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훅 들어오는 꼰대의 설교는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도를 아십니까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처음 몇 번은 신기하기라도 하지, 같은 내용이 반복되다 보면 재미도 감동도 없어 귀를 닫아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입도 닫습니다. 이어질 설교가 두려워 아예 말을 걸지 않는 거죠. 


또 꼰대는 세상을 관통하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고 자신의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요즘 것'들은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다고 믿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묻지도 않은 걸 가르치는 건 인생 선배의 뜻 깊은 조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삶을 강요하는 행위로만 받아들여집니다. 따라서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펼쳐놓은 꼰대의 과거사와 경험은 정작 ‘요즘 것들’에겐 와 닿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의 꼰대 기피도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요. 이쯤에서 저는 잠깐 딴지를 걸어볼까 합니다. 꼰대가 생기는 원인은 꼰대에게만 있는 걸까요? 꼰대는 묻지 않는 걸 답하고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꼰대가 될 만한 이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꼰대는 이렇게 항변할 수 있겠죠. '넌 왜 묻지 않았냐'고요. 그러게요. 우리는 왜 꼰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까요? 꼰대에겐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아도 당연할 걸까요? 세상이 달라졌다고, 그때와는 다르다고 해서 그들의 지식이나 경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괜찮은 걸까요? 

기자라는 직업을 하다보면 꼰대 상비군(40~50대 남성)과 제 또래의 다른 이들보다는 비교적 편하게 얘기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몇 번은 대놓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대체 꼰대들은 왜 그러는 거예요?'라고요. 꼰대에게 너는 왜 꼰대가 됐냐고 물어본 겁니다. 물론,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꼰대한테요. 단순히 자기 과시를 하는 유형이나 말이 안 통하는 단계에 이른 악성 꼰대는 걸렀습니다. 비교적 선의가 있고 합리적인 수준에 머무른다고 느껴지는 이들의 답변을 종합한 결과, 꼰대짓을 설명하는 한 단어가 있더군요. 바로 '노파심'입니다. 


좁은 골목길을 줄 지어 걸어간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발 앞에 놓인 개똥을 발견합니다. 저는 그 똥을 밟았거나,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피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뒤로 사람들이 줄 지어 옵니다.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뒷사람에게 개똥에 대해 주의를 주거나, '알아서 하겠지' 생각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꼰대는 전자입니다. 꼰대짓에는 내가 겪은 시행착오나 실패를 겪지 않았으면 하는, 또는 내가 아는 지름길을 알려주려는 노파심이 담겨 있습니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이 노파심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진 경우, 즉 똥에 대해 주의를 주는 선택을 했을 때, 그 결과는 다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좋은 조언과 충고가 되거나 그저 잔소리, 참견, 간섭으로 그치는 경우입니다. 둘을 가르는 기준은 아주 간단하죠. 듣는 사람이 모르고 있었거나, 궁금해 할 만한 걸 가르쳐줬으면 조언입니다. 반대로 그 똥 나도 훤히 보고 있거나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치웠는 데도 그걸 지적하니 듣기 싫은 잔소리입니다. 안 궁금했으면, 알고 있는 걸 굳이 말했다면 참견이 되는 거죠. 노파심이 잘못 발현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건 이런 노파심의 오류가 상대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데서, 또는 상대방이 궁금해할지 아닐지를 잘 못 판단해서 생긴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잘못된 방향의 노파심이 발현되기 전에 사전 정보가 있었다면 어떨까요. 상대가 뭘 궁금해하는 지 말이죠. 가령 질문이 있었다면요.  "길은 걸을만 해요?"라거나 "발 앞에 똥이 있는 건 알아요. 그거 말고 다른 문제는 없어요?" 같은 질문이 있었다면 이 노파심은 오류 없이 정상적인 조언과 충고로 작동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처럼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꼰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모르는 게 뭔지, 알고 싶은 게 뭔지 정확히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표현은 '질문'이라는 형태로 나옵니다. 꼰대의 자기과시, 노파심, 참견, 간섭, 이 모든 걸 한 번에 없애는 게 바로 질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은 꼰대의 쓸데 없는 조언을 쳐내는 역할도 하죠. 하지만 그러지 못하면서, 노파심은 부정적인 형태로 발현되고 꼰대가 탄생합니다. 또 내가 묻지 않았기 때문에 꼰대는 엉뚱한 소리만 하고, 그러다보니 더 소통을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최근엔 다른 방향의 문제도 나옵니다. 꼰대에 대한 사회적 기피현상이 커지면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또는 뭘 가르쳐야 할지 몰라서 아예 입을 다무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묻지 않는 것에 대해 굳이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겁니다. 골목길의 선택에서 후자를 택하는 거죠. 후배가 똥을 밟을 게 뻔히 보여도 그저 바라만 보거나, 지름길을 알아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에게 쌓인 경험이 후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요즘 것'들은 같은 시행착오를 똑같이 반복합니다. 


지식과 경험의 전달은 인류 발전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인류 지적 성장의 토대는 문자라고들 하죠. 문자를 통해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고, 전달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사소한 의사소통 상의 문제로 인해 지식이 전달되기 가장 좋은 환경 안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의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지 않고 버리고 있는 셈입니다. 물어보지 않음으로써, 우리 사회의 경험과 노하우는 단절됩니다. 사회적으로 큰 손실이죠. 


물론 꼰대가 주는 답은 정답이 아닙니다. 세상은 변합니다. 다른 시대에 모든 일은 다르게 방식으로 돌아가죠.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철 지난 경험이나 과거의 해법이 전혀 쓸모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다는 행위가 그 답의 답습을 의미하는 건 아니 거든요. 질문의 목적은 다른 사람과 과거의 답과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답을 찾는 겁니다. 


인문학자인 최진석 건명원 원장은 저서인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우리가 공자나 노자를 배우는 이유는 공자나 노자가 말한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시대문제에 맞서 고민한 과정을 보고 우리 시대의 철학을 만들기 위해 공부한다는 거죠. 질문도 비슷합니다. 꼰대가 했던대로 하기 위해서 꼰대에게 질문하는 게 아닙니다. 꼰대가 성공하거나 실패한 과정을 참고해 우리만의 답을 찾기 위해 질문합니다. 


따라서 답이 다르다고 해서 질문이 없는 게 정당해지진 않습니다. 꼰대로부터 배울 게 없다는 건 그저 오만일 뿐입니다. 일종의 '역꼰대'나 다름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질문한다고 그 사람의 모든 생각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꼰대야 그것이 정답이랍시고 열심히 설명하겠지만, '요즘 것'들은 그저 빼 먹을 것만 빼 먹고 나머지는 흘려 들으면 됩니다. 타인의 생각과 경험을 한 권의 책이라고 한다면, 질문은 그 책을 발췌독 하게 해주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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