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 글방의 첫 글감을 받아들고.
재주란 뭘까. 단어를 받아들고 나니 명확하게 떠오르는 게 없다. 어렸을 적에나 갔던 오래된 놀이터의 녹슨 그네가 생각난다. 삐걱거리는 손잡이, 벗겨진 색, 한 때 즐거워했고 익숙했으나 지금은 찾지 않아 기억 저 뒤로 미뤄둔 단어가 바로 '재주'다. 나는 요새 내가 가진 단점들만 자꾸 생각 나 머리가 터질 거 같은데, "네가 가진 재주는 뭔데"라고 물어보는 글방 첫 글감의 질문이 당황스러워 갑자기 뿌옇던 머리가 청소가 됐다. 과거의 재주들은 명확했던 거 같은데 지금의 재주는 글쎄... 도통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가 않다. 잘 모르겠다.
그럼 명확히 알고 있는 과거의 재주부터 살펴보자. 나는 잘 나댔다. 어떤 분야던 나대는 게 내 재주였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활기있던 내가 떠오른다. 골목대장이 되기를 자처했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서 친구들에게 전파했다. 좀 더 커서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춤을 만들고 친구들과 파트를 나눠서 축제를 나갔다. 그 당시 유행했던 섹시 댄스를 수많은 인파 앞에서도 내가 제일 잘났노라 당당하게 춰댔다. 육상부며 치어리더며 예체능 쪽에 두각을 나타냈다. 나는 나의 재주를 부리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뭘 잘하는 지 좋아하는지 보다, 얼마나 잘 적응하고 버티는 지가 미덕인 사회인이 되느라 명백했던 재주가 숭덩숭덩 깎여 나간 거 같다. 거쳐 온 다양한 누름돌이 기억난다. 엄마는 나대는 내가 여간 성가신게 아니었고, 잘 자라려면 자주 밟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랑스럽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너는 너무 활개치고 나대는 걸 좋아하니 내가 일부러 꾹꾹 눌러줘야 했다'고. 그런 말은 어느때고 떠올려도 억울하고 서럽다. 내가 지금 모습 그대로 어렸을 적으로 돌아간다면 엄마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다. 나를 받아들여주고 믿어줘야지 억지로 누르지 말라고. 그런 건 눌리는 게 아니라고.
나대기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시기에서 공부를 하면 더 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시기로 넘어왔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못하니 또 그게 누름돌이었다. 기가 확 죽고 나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환대하지 않았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 오랜 시간의 시작이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전공을 살려 운좋게 직장을 구했으나, 이 역시 나의 보호막이면서 동시에 누름돌이었다. 어느새 9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는 마치 독서실 같다. 출근 후 말 한마디 없이 퇴근하는 일도 많았다. 자기 할 일을 잘 해내기만 하면 되고, 왠만하면 의견내지 않는 편이 오래 가는 비법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거나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잘려나갔다. 나는 요즘 더이상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싫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감각이 너무나 지겹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약간... 거세 당한 느낌이다. 억울하고 억눌려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쓰면서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재주를 발견하긴 했는데 확실히 반짝이는 것은 아니다. 30대의 내가 가진 재주는 기다리고 참는 것, 아니면 억누르는 것이다. 교양있는 어른이 되기 위하여, 성숙하기 위하여, 같이 있으면 계속 싸우는 가족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확정된 부를 위한 돈을 모으기 위하여. 내 작은 재미와 욕망과 여유들이 삶에서 소거되었다. 작은 것에서는 돈 아끼느라 초코 우유 먹고 싶은 것 참기부터 큰 것에서는 다니기 싫은 회사 참고 다니기까지. 하기 싫어 죽겠는 의미없는 일에 삶이라는 귀한 선물을 소진하고 있다. 잘못됐다.
어렸을 때 처럼 밝고 재미나고 행복한 재주를 갖고 싶다. 재주로 인식해야 재주가 된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재주를 관찰할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많이 참았고 눌렀다. 다시 튀어 나올 때 같다. 잘 쉬고 잘 놀고 원하는 대로 하고 싶다. 삶을 나답게 잘 풀어내고 싶다.
재주라는 글감으로 이렇게 어두운 글을 쓰는 것도 나름의 재주가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