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진 머리에 피주머니를 주렁주렁 달았지만, 소변줄을 제거하고 링거 스탠드에 기대 거동할 수 있게 되었다. 병실 복도를 천천히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달라 보였다. 간호사들은 "젊어서 확실히 회복 속도가 빠르다"며,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말소리는 혀의 붓기 때문에 절반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절단면의 혀와 팔 조직이 잘 붙도록 꿰맨 상태라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목과 팔, 혀 수술을 받아놓곤 왜 그렇게 복도를 죽도록 걸었는지. 일상으로 복귀하고 싶은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아내는 늘 그런 내 옆에서 함께 걸어 주었다.
혀의 붓기가 빠르게 가라앉아 가고 있을 때였다. 어둑어둑 해진 밤, 전화기 진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 회복하고 있어? 지금 병원에 왔어."
길운이 형이었다. 치과 영업을 마치고 가산동에서부터 멀리까지 와준 것이다. 그의 옆에는 또 한 명의 얼굴이 있었다. 회사의 시스템 책임자였다. 내가 병을 얻기 직전,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던 그 사람.
"너를 위해 내가 특별히 이렇게 해주겠다"는 말은 많았지만 그뿐이었던 적이 많았던 그. 15년간 약속을 지켰다면 지금껏 그는 나와 나의 초기 팀 멤버들에게 참치를 여러 번 사야 했다. 아직 맛본 적은 없다. 프로젝트 진행용 서버를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총괄 대표와의 회의에서 내가 서버를 챙기자, "다음 수주 때나 가능하다"며 말을 바꿔 당황스럽게 했던 그였다. 그러던 그가 내 소식을 전해 듣고서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얼어붙었던 감정의 빙산이 줄줄 녹아내렸다. 돌이켜 보면 회사가 매각되기 전까지는 내 역량을 높이 평가해 여러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었다. 근래의 처세는 사모펀드가 회사를 인수한 이후 새로 온 세력들 앞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내세워 본인의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음을 이해한다.
내 암 소식에 적지 않게 당황한 그는, 그동안의 일만큼을 진심에 더하여 위로해 주었다. 코로나의 여파로, 병실은 외부인 출입 금지라서 한 시간 정도 병원 로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발음은 여전히 정확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야, 수술 전이랑 거의 비슷해졌네!"
길운이 형이 기분 좋은 리액션을 보였다. 시스템 책임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번에도 건강히 퇴원만 하면 맛있는 걸 사 주겠다고 했다.
"혀가 반이니, 맛있는걸 두 배로 사줄게. 얼른 나아라"
너무나 기분 좋고, 고마운 순간이었다. 반가운 얼굴을 만나니 벌써 회복해서 일상으로 복귀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 혀는 생각하는 말의 절반만 구사할 뿐이었다.
한 젊은 환자가 새롭게 입원실에 들어왔다. 이 환자는 당황한 목소리로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있었다.
"수술을 하려면 반드시 보호자가 있어야 한대요. 꼭 가족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하는데..."
여러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다들 학업에 바쁘거나 사정상 곁을 지켜줄 수 없다고 하는 듯했다. 한참 후에 가까스로 누나의 아들, 조카가 와주기로 해서 겨우 수술에 들어갔고, 필요 이상으로 빨리 퇴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출산으로 인구 절벽에 치닫고 있는 지금, 우리 다음 세대의 노후에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는 미혼 외동들이 어떻게 치료받을 수 있을까. 잠시 고민과 걱정이 스쳐갔다.
태어나서 가장 오래 머리를 안 감고 버틴 기간을 더는 참지 못 하고 목 수술 부위가 아물기도 전, 욕조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이 내 모습을 본 미옥 간호사님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절대로 이러면 안 돼요!"
임파선을 제거하느라 목 가운데부터 우측 귀까지 길게 꿰맨 상처가 있었지만, 마약성 진통제 덕분에 아프지 않아 개운하게 머리를 감고 있었던 것이다.
"안 될 것 같은 건 하지 말고, 해도 되나 안 되나 모르겠는 것은 물어보고 하세요. 젊어서 회복이 빠른 건 맞지만 이러다 큰일 날 수 있어요!"
무서운 미옥 간호사님이 진심으로 나를 위하는 마음이 느껴져 고마웠다. 이후 5일쯤 지나서야 그녀는 머리 감기를 허락했다.
"아래 미용실에서 머리 감겨주는 서비스가 있어요. 그걸 이용하는 것도 좋을 거예요."
병원 1층 미용실은 일반 브랜드 프랜차이즈였는데, 다른 가게와 달리 일반용과 환자용 머리 감기 메뉴가 따로 있었다. 환자용은 일반보다 훨씬 비쌌다. 우리는 일반 서비스로 선택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직원분은 흔쾌히 머리를 감겨주셨다. 수술 부위가 무리되지 않도록 조심 조심 하지만 너무나 시원하게 감겨 주셨다.
"환자인데 환자 서비스로 해야죠."
추가 매출 기회를 놓친 미용실 사장이 직원을 나무라듯 말했지만, 그 직원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머리를 감겨주셨다. 이 분도 진심으로 나를 안쓰러워하며 도와주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했다.
머리는 함부로 감으면 안 되지만, 감을 수 있을 때 이런 서비스를 이용하면 너무나 개운하고 행복하다.
슬기 선생님이 한동안 병원에서 숙식하며 늘 집에도 안 가더니 교체가 이루어졌다. 새로운 주치의는 동호 선생님이었다. 수려하고 잘생긴 외모의 반듯한 청년으로 보이는 의사였다.
매일같이 내 팔과 목을 정성스럽게 소독하고 상태를 체크했다. 시간이 지나자 실밥 제거와 최종 혀의 실밥 제거까지 묵묵히 하루도 빠짐없이 진료해 주었다.
"치의대는 얼굴도 시험 점수 요소에 포함인가? 슬기 선생님도 참 예뻤는데 동호 선생님도 참... 우리 아들 같다."
아내도 동호 선생님을 마음에 들어 했다. 문득 결혼할 때 내 어떤 게 제일 매력적이었냐는 질문에 "나 얼굴 보고 결혼했잖아. 말 안 했나?"라고 했던 아내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럼에도 현실성 없는 나이차 때문인지 동호 선생님에겐 경계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고마웠다.
매일 회진 오는 익재 교수님은 돋보기안경을 껴서 눈이 커 보였다. 환자에게 희망 따위를 심어주기보다는, "다 좋을 거다, 괜찮을 거다" 같은 설명은 전혀 없이 필요한 내용만 정확히 설명해 주는 캐릭터였다. 수술을 워낙 잘해서 설명보다 치유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훨씬 더 좋았다.
2인실에서 몸을 가늘 수 있을 무렵 5인실로 옮겼다. 커튼 안 공간은 2인실과 똑같았다. 이 5인실의 터줏대감은 내 옆자리의 할아버지였다. 몇 년 만에 재발한 구강암으로 2차 수술을 받으신 그는, 말 대신 '에에에'하는 짜증 섞인 소리와 필사적인 몸짓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헌신적으로 보이던 할머니조차 그 말을 온전히 알아듣지는 못했다.
"이쁘게 말을 해야지~"
할머니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그를 다독였지만, 할아버지의 짜증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어느 날 밤, 그는 복도 쓰레기통의 쓰레기를 병실 바닥에 내던지며 화풀이를 하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간호사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듣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아픔이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고 어리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할아버지의 짜증 섞인 웅얼거림이 지겨울 즈음 등장하는 그의 씩씩한 방귀소리까지를 배경음악 삼아, 나는 병상 위에서 나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새롭게 바뀐 부문 대표님은 전체 직원 면담을 통해 나를 높이 평가해 주셨고, 특별히 회사의 의사결정이 필요한 시점에 참여할 수 있다면 입원기간 또한 근무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간간이 조직원들 메신저에 답하며 컴퓨터를 켜두고 내 목소리 TTS를 범용 서비스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내 '디지털 목소리'를 이제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시간이었다.
"병상에서 수억 법니까? 안정 취해야 한다고요!"
또다시 미옥 간호사님이 분노했다. 그녀는 병원에서 가장 오래된 간호사 중 한 명이었다. 다른 간호사들도 무서워하는 듯했지만, 그 마음 깊은 곳의 따뜻함에서 진심으로 환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장인임이 쉽게 느껴지는 진정한 의료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존경심마저 느꼈다.
완성된 AI 모델을 서버에 올리고, 누구나 어디서나 스마트폰에서 텍스트를 입력하면 내 목소리로 말해주는 간단한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첫 문장을 타이핑했다.
'여보, 사랑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스마트폰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것은 수술 전 녹음했던 바로 내 목소리였다. 조금의 어색함도 없는, 온전한 나의 목소리.
그날 이후 나의 병상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 혀의 붓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자유롭게 '사랑한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내의 식사 시간을 챙기고, 간호사에게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곁을 지켜주는 아내에게 몇 번이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나의 디지털 목소리로.
어느 날 저녁, 옆자리 할아버지가 또다시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는 들으라는 듯 노트북의 볼륨을 조금 높여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돌봐줘서 고마워. 사랑해."
내 목소리가 커튼을 넘어 그의 귓가에 가닿기를 바랐다. 당신 곁의 그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부디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나만의 서툰 메시지였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며칠 후 할머니는 병원에 오는 횟수를 줄였다. 나의 행동이 할아버지의 반성을 이끌어내기보다, 할머니의 상대적 박탈감을 키운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내 디지털 목소리를 내가 만들었지만 참 신박한 물건인지라,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지훈에게 링크를 보내주었다. 그는 곧바로 내 목소리로 만든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함트인데, 지금 돈이 너무 급해서 돈 좀 빌려줘. 계좌번호는...."
아뿔싸. 나는 한 적도 없는 말로 내 목소리가 사기를 치고 있는 게 아닌가. 놀라워해달라고 보낸 링크에서 보안 이슈를 일깨워 준 그. 고맙기도 하면서, 늘 그 다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내 목소리는 나만 쓰기로 하였다.
대신 구글의 범용 목소리로만 바꾼 복제 프로젝트 '말로 해(mal.roe.kr)'를 새롭게 만들었다. 치과병원 입원실 복도를 걸으며 조금 놀랐다. 환자들의 나이대가 어리고 젊은, 스마트폰을 아주 잘 사용할 세대의 사람들이 꽤 많았다. 이들은 모두 턱이나 입 안을 수술해 나처럼 말을 못 하는 채로 걷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 누구나 쓸 수 있게 안내해 달라고 '말로 해' 서비스를 미옥 간호사님에게 전달했다. 그때 그녀의 밝고 환한 미소가 선명하게 기억된다.
"역시, 젊고 똑똑한 사람이네요."
그녀의 칭찬이 기분 좋았다. 병상에서 수 억 버냐고 혼날 때 만들던 게 이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뒤 끝 있는 남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 말을 아꼈다. '말로 해' 서비스 홈페이지 맨 위에는 내 수술을 집도한 교수님들과 주치의 선생님들, 그리고 미옥 간호사님을 나란히 적었다. 나에겐 모두 똑같이 고마운 분들이었다. 고마운 사람 하면 떠오르는 나와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바쁘게 달린 정희, 지훈, 신영, 혁진 그리고 현중. 이 고마운 초기 팀 멤버의 이름들은 내 가슴 깊이에 크고 깊게 적었다.
일주일간은 콧줄을 통해 주사기로 환자식 두유를 밀어 넣었다. 꿰매놓은 혀를 거치지 않으니 회복에는 좋았겠지만, 맛도 본 적 없는데 배가 부른 기분 나쁜 억울함이 있었다.
일주일쯤 지난 후 미음이 나왔다. 흰 미음, 흑임자 미음, 호박 미음 세 개가 돌아가며 나왔는데, 나는 흑임자 미음이 제일 좋았다. 입으로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이것도 콧줄을 통해 주사기로 밀어 넣었다.
며칠 후 동호 선생님은 혀에 꿰맨 부위 중 잘 붙은 몇 군데 실밥을 뽑았다. 그때부턴 조금씩 수술 안 한 혀 쪽으로 놓고 삼키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흑임자 미음을 왼쪽 어금니 쪽에 넣어 삼켜보는 순간, 약 열흘 만에 혀에서 느끼는 이 '맛'이라는 감각! 한 번도 고마워해본 적 없는 이 행복감에 온몸이 뒤틀렸다.
"여보, 그 식혜 좀 줘봐."
"절대 안 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아내를 한참 설득해서 뚜껑을 땄다. 두근거렸다. 밥알 없이 식혜 물만 몇 방울을 입에 떨어뜨려 보았다.
엄청난 꽃씨가 혀에 뿌리를 내리고 움을 틔워 개화되는 듯, 혀에서 시작된 달콤한 미각이 온몸을 꽃밭으로 물들이는 엄청난 행복감이 밀려왔다. 처음 달콤한 맛을 다시 본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동안 재건된 오른쪽 구릿빛 혀는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선거일이 다가왔다. 미옥 간호사님에게 말했다.
"집이 20분 거리인데, 투표하고 올게요."
교육감 선거일이었다. 미옥 간호사님은 걱정을 하면서도 허락해 주었다. 아내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목에 햇빛이 닿지 않도록 목수건을 하고, 아내가 사 온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새 모자를 눌러쓰고 병원 밖을 나섰다.
4월 중반을 지나고 있어 온 병원이 꽃에 묻혔고, 햇살은 따뜻하고 불어오는 살랑바람에는 꽃향기가 실려 있었다. 그 풍경을 아내와 손을 잡고 걸었다.
포근한 집에 도착해 선거 준비를 하면서 포근한 침대에 잠시 누웠다. 한 번도 감사해 본 적 없이 당연히 누워 자던 침대였는데, 이토록 포근하고 아늑한지 이제야 알았다. 등을 다시 떼어 일으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투표를 마치고 우리의 앞날을 향해 깔아 둔 레드카펫처럼 꽃잎 위를 걸으며 짧은 외출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퇴원 날짜를 알 수 없던 우리는 다시 짐을 풀고 병원 침대에 누웠다. 새로 온 환자로 병실이 또 시끄러웠다.
"피 뽑는데 바늘을 몇 번 찌르는 거야! 벌써 일곱 번 찔렀어!"
성격이 모난 완벽주의자 할아버지가 들어오신 것 같았다. 간호사들은 또 실수할까 봐 떨었고, 1년 차 전공의 선생님들이나 어린 간호사들은 주치의 선생님에게 넘기고 싶어 했다.
"환자분~ 그럼 우리 병원에서 제일 주사 잘 놓는 주치의 선생님 불러드릴까요?"
"주치의 누구? 주치의도 나를 몇 번이나 찔렀어!"
할아버지가 화를 내니, 마치 성공 가능성이 적은 어려운 프로젝트를 한 번에 성공시키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팀장의 부담감이 떠올라 간호사들의 심리가 공감이 되면서도 웃음이 났다.
치과에서는 주삿바늘로 정맥에 꽂고 링거를 놓는 일보다는 치아를 갈고 뽑고 고치는 일이 대부분일 테니, 이런 작업은 부담스러워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수술 당시 왼쪽 가슴에 포트를 연결해 수십 수백 팩의 링갤을 맞을 때 바늘을 핏줄에 꽂지 않고 포트에 꽂으면 되도록 장치를 해 두어 링거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날의 외출로 며칠은 병원에서 더 보낼 힘이 비축된 그때였다.
"환자분, 내일 퇴원입니다."
갑작스러운 결정에 동호 선생님도 나를 불러 앞으로 어떻게 치료가 진행되는지 설명해 주었다.
"3개월마다 CT를 찍어 추적 관찰할 것이고, 팔이 차오르거나 이상 현상이 있으면 바로 병원으로 와야 합니다. 혀는 1년 반 동안 조금씩 작아지는 통계가 있으니 지금 부기가 빠지고 더 작아지면 좀 더 편안해질 거예요."
꼼꼼한 설명을 듣고 기억했다. 또, 내 절제한 환부의 세밀 조직검사는 1기로, 외부만 암세포였으며, 심부의 단단한 조직은 암이 아니라고 하였다. 심부가 커서 많이 도려냈는데, 심부는 암이 아니라니. 너무 과도한 절제가 아니었을까 하다가 '젊으면 세포활동이 왕성해 전이가 잘 된다'는 교수님 설명이 떠올라 더 생각하지 않았다.
미옥 간호사님이 다가왔다.
"내일 퇴원이라던데요? 고생 많이 했네요. 잘 회복하시고... 고생 많았어요."
퇴원이 결정된 날, 나와 같은 날 퇴원하는 옆 침대의 할아버지는 홀로 짐을 쌌다. 할머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뜸해지던 후부터 할아버지도 익숙함에 가려 감사하지 못했던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잘하지 못하는 발음으로 짜증은 모두 사라지고, 커튼 너머로 들려오는 통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보고 싶어... 나가면 맛있는 거 나랑 같이 먹자."
내 아버지가 내게 결혼할 때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초심을 잃지 마라. 지금 그 마음을 항상 들여다보아라.' 타산지석으로 삼아 소중하고 고마운 내 아내를 변온동물의 체온처럼 익숙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퇴원 날 아침, 수술복을 입은 슬기 선생님과 입원동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내 목과 팔을 구석구석 살펴보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잘 되었네요. 퇴원 축하해요!"
그 따뜻한 미소에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아내와 함께 병원 문을 나서며 돌아본 이곳은 고통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만난 곳이기도 했다. 미옥 간호사님, 동호 선생님, 익재 교수님, 그리고 슬기 선생님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이제 정말 집에 가는 거야?"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답했다. 아직 발음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충분히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이 너무 좋은데. 꽃도 만발이고. 창경궁 걸을래?"
4월의 따뜻한 햇살 아래,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향해 걸었다.
뜯지 않은 온전한 그 식혜 한 통을 손에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