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웅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다! 환자가 다 했어요! 15시간 동안 수혈 한 번 없이, 환자분 심장이 다 해냈어요!”
마취의 깊은 안갯속에서 건져 올려진 첫 감각은 청각이었다. 수술 전, 내 팔에 꼭 맞는 부목을 만들어주던 슬기 전공의 선생님의 목소리. 그들의 환호 속에서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15시간을 버텨낸 내 심장이 대견했고, 이 기나긴 싸움의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실감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밀려왔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하는.
정신을 차리니 집중치료실이었다. 시간의 개념이 사라진 곳. 강한 마취약 때문인지 그곳에서의 기억은 조각난 필름처럼 흐릿하다. 훗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잠자리에 유독 예민한 내 아내는 내가 의식을 잃고 있던 그 이틀 동안 거의 뜬 눈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내 옆을 지켰다는 것. 그녀 또한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이 멍하다고 했다. 그 고마움과 미안함이 나중에야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틀 후, 혀의 붓기가 약간 가라앉아 입이 다물어질 정도가 되자, 2인실로 옮겨졌다. 뽑히지 않을 엑스칼리버처럼 느껴졌던 호흡관을 떼고 콧줄로 연결한 뒤, 드디어 걸을 수도 있게 되었다. 복도를 나서자마자 느낀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목과 팔에 피주머니를 주렁주렁 단 나는, 일반적인 치과병원 환자가 대부분인 이곳에선 단연 눈에 띄는 존재였다.
“큰 수술받으셨나 보네…”
지나가며 던지는 혼잣말 같은 말들. 그 속에는 아내가 사연을 들려주었으면 하는 호기심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이 과정을 입에 올리려 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보였다. 내가 보기엔 너무나 덤덤히 내 옆을 지켜주고 있었지만, 이는 평온한 호수 아래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드러내지 않음이었으리라.
며칠이 지났을까. 간호사가 들어와 쾌활하게 말했다. “소변줄 제거할게요.”
그 순간, 머릿속에 빨간 경고등이 켜졌다. 수술실에서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팔과 목, 혀를 수술하는데 왜 바지까지 끈을 풀면 앞뒤로 분리되는 수술복을 입었던 걸까? 설마 15시간 동안, 그 많은 의사 간호사 선생님들 앞에서… 40여 년간 감춰 온 나의 비밀스러운 몸뚱이가 공개 관람이라도 되었던 건 아닐까. 민망한 상상에 귀가 빨개졌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이들은 프로다.’
아끼는 소스코드를 오픈소스로 공개할 마음을 먹듯, 간호사의 내 몸뚱이 관람을 견디기로 마음먹은 그때였다. 뒤 이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등치가 산만한 남자 간호사였다. 그는 능숙하고 씩씩하게,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깊이 박힌 소변줄을 당겨 제거했다. 호스가 뽑히는 느낌이 별로였다.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거기에는 낯선 사람이 서 있었다. 건강할 때 지키지 못해 이런 꼴이 된 나 자신. 하지만 그를 오래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정신이 완전히 들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내 목소리를 학습 중인 인공지능이었다.
퉁퉁 부은 왼쪽 손으로 노트북을 켜고 집 컴퓨터에 원격 접속했다. 모니터 위에는, 내 목소리에 매우 가까운 근사치로 수렴된 그래프가 떠 있었다.
녹음 한 목소리와 텍스트로 생성한 AI 목소리의 차이가 거의 없는 그래프를 보니 기대감에 심장이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문장을 입력하고 엔터 키를 눌렀다.
놀라웠다.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인 소리가 노트북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녹음했던 문장은 녹음 파일을 재생한 것처럼 똑같았고, 처음 보는 단어들도 약간의 어색함만 섞여 있을 뿐, 분명한 나의 억양을 담고 있었다. 지금 나는 ‘어어어’ 소리밖에 낼 수 없는 상황에서, 다시 손가락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흥분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 해결이 아니었다. 무너지는 하늘에서 내가 직접 파낸 솟아날 구멍이었다.
곧이어 간호사가 링거를 교체하러 들어왔다. 나는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내가 자꾸 끼니를 걸러서요. 병원 식당까지만 아내와 함께 다녀와도 될까요?”
1~2초 뒤, 노트북이 내 제2의 성대가 되어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간호사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다른 환자도 쓸 수 있는 것인지 물었다. “지금은 안 되지만, 입원하는 동안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 순간, 나의 오랜 꿈이 떠올랐다.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없었을 때보다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떠나는 삶.’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래밍이,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내 꿈을 이룰 기회를 가져다준 것이다.
간호사는 신기한 장난감을 만든 나를 특별 배려해 주듯, 웃으며 달콤한 데이트를 허락했다. 수술 3일 차, 나는 떡진 머리와 피주머니를 주렁주렁 단 부끄러운 모습이었지만, 세상 가장 든든한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링거 스탠드에 기대어 밀며 병원 식당으로 향했다.
혀의 붓기 때문에 말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자유롭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 손가락과, 내가 만든 목소리와, 최신 기술을 공부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오른쪽 혀는 사라졌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는 팔뚝 살이, 기능적으로는 나의 AI가 그 자리를 채워, 나는 계속해서 내 목소리로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다시 태어난 세상에서 맞이한, 첫 번째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