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나에게 익숙해지기

by 함트

병원 문을 나선다고 해서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입원 환자’라는 이름표를 떼는 대신, ‘낯선 나’로 세상으로 복귀했다.



거울 앞에 선 나는 매일 아침 새로운 몸을 익혀야 했다. 좌측 팔뚝에는 살점이 움푹 파인 채 길게 그어진 투박한 바느질 자국이, 우측 목에는 꿰맨 흔적을 감추려 노력한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입안의 혀는 절반의 맛을 잃었고, 머릿속의 문장을 온전히 말로 바꾸지 못했다. 무엇보다 불편했던 것은 힘을 잃은 오른팔과 어깨였다. 목 수술 시 끊어진 신경 때문인지, 우측 어깨가 앞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쏟아진 오른쪽 어깨를 제자리로 보내려면 왼 손으로 밀어줘야 했고, 밥을 먹을 때면 팔꿈치를 식탁에 얹고 지렛대처럼 손을 움직이며 이 몸에 적응해야 했다.


실장이란 자리는 많은 소통을 해야 하는 자리다. 경청하고,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하며 구성원들을 이끌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내 머릿속의 명료한 언어를 이 반쪽짜리 혀로는 전달하기 힘들었다. 사실, 이런 이유보다는 사모펀드가 인수한 이 회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더 솔직한 심정이었다. 암 수술 직후, 벗어나고 싶던 현실에 다시 나를 구겨 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매일 밤 인생의 우선순위를 다시 재정렬했다. 지난 15년간 내 인생의 최전선에는 늘 회사가, 내 조직이, 그리고 초창기 멤버들과의 의리가 있었다. 하지만 암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넘고 온 지금, 내 지도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는 ‘나의 건강’과 ‘가족과의 시간’이었다.


나는 15년간 쌓아 올린 공든 탑, 이 회사를 퇴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은 어려웠다. 15년간, 하루 중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던 동료들을 잃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하지만 그들과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웃기 위해서는 지금 멈춰야만 했다. 나는 고집스럽게 마음을 다잡고, 호기롭게 사표를 던졌다.


15년의 근속기간, 안정적인 월급, 실장이라는 직함.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는 오직 ‘살아남기’와 ‘사랑하는 이들과 시간 보내기’라는 단 두 개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용감하고, 어쩌면 가장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퇴직금과 스톡옵션이 들어왔을 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캐나다행 비행기 표를 결제했다. 20년간 누나가 살고 있는 그 먼 땅을, 나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암을 밟고 지나온 내게, 아껴야 할 돈과 미뤄야 할 시간은 더 이상 없었다.


캐나다에서의 시간은 치유 그 자체였다. 로키산맥의 심장부에서 텐트를 치고 폭우와 우박을 견뎠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고요 속에서 피톤치드 가득한 공기로 숨을 쉬었다. 레이크 루이스의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 위, 동화처럼 떠 있던 빨간 카누. 그 위에 아들, 딸, 아내와 함께 앉아 노를 저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앓았던 모든 아픔을 현실 너머의 풍경으로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긴 캐나다에서의 휴식 끝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굳어 있던 오른쪽 어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원의 MRI로도 찾지 못했던 문제의 답이, 대자연과 시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일어설 준비가 되었다. 마침 평소 존경하던 분의 벤처기업에서 좋은 기회를 주셨고, 나는 상장사 개발 실장에서 내실 튼튼한 회사의 임원으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다. 훗날 에세이에 내 초창기 팀원들과의 합류 순간을 묘사할 수 있도록 매 일, 매 시간 열심히 달려 큰 성장을 이룰 것이다.


수술 후 1년이 훌쩍 넘은 지금, 혀는 여전히 수술 전과 같진 않지만 부기가 빠지면서 이제는 내가 수술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모든 과정의 처음과 끝에는, 언제나 사랑하는 내 아내가 있었다. 때로는 목발이, 때로는 친구가 되어주며, 낯선 수술 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내가 편히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밀어 올린 나의 유일한 추진체.


달라진 내 모습으로, 더 단단해진 나의 삶으로, 나는 이제 그녀에게 받은 큰 사랑을 평생 보답한다. 이것이 내가 낯선 나에게 익숙해지는 마지막 과정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