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5개월 전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잠 못 이루며 이 글을 찾아냈을 당신에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
암이라는 선고 앞에서,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을 믿는다. 그 과정에서의 가장 큰 두려움은 살아남은 ‘그 이후’의 삶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막연함이다. 수술 후 나는 어떤 장애를 안고, 무엇을 포기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치열했던 질문에 대한, 1년 5개월을 살아낸 나의 답장이다.
[암이 내게서 앗아간 것들]
살아남기 위해, 나는 가장 소중했던 것부터 내려놓아야 했다.
내 인생이 한 장의 종잇장이었다면, 지난 15년간 다닌 회사는 그 뒤를 든든히 받쳐주던 벽과 같았다. 그 안에는 내 30대의 모든 열정과 성취, 그리고 그 누구보다 끈끈했던 동료들이 있었다. 연 매출 127만 원짜리 팀을 맡아 회사 전체 매출의 75%를 책임지는 조직으로 키워냈던 기억. 다른 팀이 모두 포기했던 불가능한 프로젝트들을 여럿 성공시키고 ‘어벤저스’라 불리던 우리. 나의 전성기와도 같던 ‘회사’라는 존재를, 나는 내 손으로 도려내야만 했다. 어디서 다시 못 볼 능력 충만한 전우들을 잃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지만, 그것이 생존을 위한 첫 번째 조건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의 일부를 잃어야 했다.
오른쪽 혀는 감각을 잃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이제 왼쪽 어금니로만 음식을 씹는다. 과부하가 걸린 왼쪽 어금니는 몇 번이나 깨져나갔고, 결국 미관을 포기하고 위아래 모두를 싯누런 금으로 씌웠다. 왼쪽 턱 근육은 눈에 띄게 비대칭이 되었다.
발음도 잃었다. 짧은 대화는 무리가 없지만, 조금만 말이 길어지면 혀가 피로를 느끼며 발음이 뭉개진다. 하품을 하거나 입가에 묻은 것을 떼려 무심코 혀를 내밀면, 구릿빛 팔뚝 살로 만든 재건 부위가 드러난다. 그럴 때마다 혹여나 나를 이상하게 볼까, 주변의 시선을 살피는 새로운 눈치가 생겼다.
[그리고, 암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무언가를 손에서 놓아야만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있는 법. 암은 질주하던 내 삶에 가장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어주었다. 높이 쌓아 올린 성과는 낙폭이 되어 돌아왔다. 매일같이 속을 끓이고, 거의 매일 밤 술기운에 기대 하루를 마감하던 삶이 멈춰 섰다. 불나방처럼 더 높은 자리만을 향해 달려가던 내가, 처음으로 내 곁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게 멈춰 선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가족의 손을 잡고 캐나다의 대자연으로 향했다.
로키산맥의 심장부에서 텐트를 치고, 에메랄드빛 빙하 호수 위에서 빨간 카누를 젓던 기억. 돈만 벌어다 주는 아저씨가 아닌, 아이들과 온전히 애착을 형성한 진짜 ‘아빠’가 되었던 그 순간들. 만약 죽기 직전 가장 행복한 기억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가족들과 보낸 캐나다에서의 시간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비워진 내 손에 새로운 기회가 쥐어졌다.
관리직의 무게를 내려놓고, 나는 다시 실무 개발자가 되었다. 작은 벤처기업의 임원이자 실무자로서, 우리가 만든 서비스에 만족하는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날아다니던 주니어 시절의 성취감을 다시 맛보고 있다. 규모가 작으면 불안정할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였다. 회사는 튼튼했고, 매 해 두 자릿수 성장을 진행 중이며, 새롭게 만난 동료들은 겸손하고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해외 결제 시스템을 붙여 매출의 통로를 넓히는 일을 시작으로, 다른 걱정 없이 오롯이 개발의 즐거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근무 중이다.
나는 오른쪽 혀를 잃었다. 15년간 일하던 회사도 떠나보냈다. 하지만 그 빈자리 덕분에, 나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가장 단단한 토대를 되찾았고, 일의 본질적인 기쁨을 다시 깨달았으며, 내 인생의 진짜 맛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전우들과 다시 이곳에서 '회사', 모여서 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분명 살면서 무언가를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비워진 그 자리에,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훨씬 더 귀한 것들이 채워질 수 있음을, 나는 나의 지난 1년 5개월로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