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색깔

일산, 베이징, 오슬로.

by 햄통

중국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원을 걷다가, 베이징 태양궁공원을 걷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도 나이고 지금의 나도 나인데, 벌써 6개월이 훌쩍 지나 그때의 나는 베이징에 있었고 지금의 나는 한국에 있다는 게 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시공을 초월한 것 같기도 하고.


단지 일상적인 산책일 뿐인데 그런 오묘한 느낌이 든 건, 아마 공원의 잔디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베이징 태양궁 공원의 끝이 없이 펼쳐지던 광활한 잔디, 멀리멀리 왕징 소호 건물 근처 하늘에 걸쳐 있던 하얗도록 밝던 달, 2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하던 밤.


드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고 어두워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들판에서 나는 알 수 없는 벅찬 기분에 어둠도 찬 바람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자연의 광대함을 느끼고 싶어서 벌판을 방향없이 이리저리 맴돌기도 하고 가로질러 걷기도 하고 괜히 쭈그려 앉아보기도 했다.


나를 그렇게 가슴 벅차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일종의 경외감 같은 거였을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섭게 차가운 바람, 끝이 보이지 않는 평지, 믿을 수 없게 휘황찬란한 달, 그 자신감 있게 멋진 것들 위에 내가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다니. 이런 멋진 조합의 조화를 나 혼자 가질 수 있다니.


“산기슭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정상은 장엄하다. 엄청난 높이는 우리의 호흡을 멎게 하지만, 신기하게도 정신은 오히려 의기양양해진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서도 싱긋 웃음을, 아니 존재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살아 있다는 이유로 그런 장관을 볼 수 있다는 근원적인 기쁨을 표현하는 순진무구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p297, 알랭드보통, 철학의 위안)


가로등빛과 주변 아파트 건물에서 새어져 나오는 불빛 때문에 일산 동네 산책길의 하늘은 밝은 남색이다. 덕분에 늦은 밤도 매우 안전하게 느껴진다. 베이징의 밤은 군청색이었다. 처음엔 그 도시의 조도가 낯설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산책을 나가면서 깜깜한 밤 하늘을 보고 ‘하긴, 밤다운 밤이다.’ 그런 혼잣말을 했다. 밤이 너무 어둡다고 투덜대던 내게 말했다. 야, 밤이니까 어둡지. 밤은 원래 어두운 거야.


노르웨이의 밤하늘은 때론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그렇게 말그대로 ‘깜깜한’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박혀 있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별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가까울 거라고, 하늘에 우리가 볼 수 있는 별이 그렇게 많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충격적이고 경이롭고, 너무 아름다워서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오던 날에는 하늘을 쳐다보느라 고개가 너무 아파 몇번이나 고개를 숙이고, 다시 보고, 숙이고, 다시 올려다보고 해야 했다. 아무리 봐도 지겹지 않은 평생 잊지 못할 광경. 그 순간을 잡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늦은 밤 앞동 빨래방을 가기 위해 검정색에 가까운 밤길을 뚫어야 하는 날에도, 하늘 가득 빈틈없이 반짝이는 별 조명을 받으면 왠지 보호막 아래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맨발 슬리퍼에 차가운 눈이 마구 침범해도 사춘기 소녀처럼 깔깔 웃던 스무살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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