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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햄통 Jun 18. 2021

중국 휴지의 모든 것

휴지에 이렇게 집착할 일인가

열셋 아님 열네살 쯤이었던 것 같다. 생전 처음 중국이라는 나라에 갔다. 단체 여행인지 캠프였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식사 때가 되어 식당에 갔다가 휴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당시 중국 식당에는 한국 식당과 같이 식탁에 휴지가 놓여있지 않았다. 난 태어나서 한번도 ‘휴지’란 말을 중국어로 해본 적이 없었기에 떨리는 마음을 잡고 조심스럽게 직원에게 다가갔다. “卫生纸(웨이셩즈)” 라고 슬며시 얘기했다. 자신 없는 목소리가 작았던 탓인지 아니면 발음이 틀렸던 탓인지, 종업원은 친절하게 화장실(卫生间, 웨이셩지엔) 방향을 가리켰다. 아니면 종업원이 매번 손님들로부터 받는 보편적 질문이 화장실의 위치를 묻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卫生纸’ 란 단어가 틀린 건 아니지만, 식당에서 쓰는 냅킨을 가리키는 적합한 표현은 아니다.) 나는 부끄러워서 애당초 화장실을 물었던 의도였던 양, 고맙다고 하며 화장실을 다녀왔다. 어린 맘에 자존심 상하고 속상했던 느낌이 잊혀지지 않는다. 


몇 년 후 중국 호텔. 호텔 방에 있던 나는 ‘티슈’가 필요했다. 전화해서 티슈를 갖다 달라고 하고 싶은데 ‘티슈’가 중국어로 뭔지 알 수 없었다. 화장을 할 때 쓰는 휴지고 보통 한국어로는 ‘화장지’ 라고도 하니 ‘化妆纸’ 라고 하면 될까?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化妆纸(화장즈) 좀 갖다 주세요.” 전화를 받은 직원은 뭐라 뭐라 하더니 화장할 때 쓰는 ‘화장 뭐시기’가 필요한 거냐고 했다. 나는 뭔지 몰라서 — 갖고 오는 게 뭔지 보려고 — 그렇다고 했다. 띵동. 직원의 손에는 작고 가벼운 화장솜(化妆棉, 화장미엔)이 살포시 얹혀있었다. 나는 빈 티슈곽을 내어 보이며 내가 필요한 것은 이거라고 했다. 직원은 웃으며 ‘抽纸(초우즈)’라는 단어를 말했다. 직원이 돌아가고 나는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아 뽑아쓰는 휴지이니까 이걸 抽纸라고 하는구나(抽가 뽑는다는 뜻)' 하며 감탄했다.


그 뒤로 나는 ‘휴지’ 라는 물건을 유심히 봤다. ‘휴대용 휴지’라고 하는데 한국과는 사뭇 다른 생김새의 휴지가 눈에 띄었다. 손바닥 만한 크기의 포장에 조금 도톰한 휴지가 10장 정도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휴지 한 장당 크기도 쓸데없이 크고 한 팩당 10장이라는 개수도 적어서 불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쓰다 보니 훨씬 편할 뿐더러 중국인들의 습관에 맞는 휴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중국에는 화장실에 휴지가 없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휴대가 간편하고, 조금 도톰하고 큰 크기의 휴지가 유용했던 것 같다. 자세히 보니 포장에 ‘手帕纸(쇼우파즈)’라고 써 있었다. 손수건처럼 쓰기 때문에 手帕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 단어를 얘기해 보았는데 알아 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슈퍼에 가서 찾는다고 해도 그냥 纸巾이나 面纸 라고 하지 아무도 手帕纸라고는 하지 않았다. 상품명 같은 것이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은 아니었던 거다.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이 크기가 좋아서 한국에서도 이 사이즈의 휴대용 휴지를 사서 쓴다.


‘휴지’라는 말이 뭐 이렇게 어려운 거지? 나는 일단 ‘纸’라는 단어가 이상했다. 纸는 종이란 뜻이 아닌가? 휴지를 달라고 했는데 종이를 달라고 하면 어쩌지? 그 후에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용도에 맞게 휴지라는 단어를 분류하고 사용하게 됐다. (纸가 종이인지 휴지인지는 상황에 따라 알아서 구분한다) 교과서에서도 통대에서도 아무도 이런 걸 가르쳐주지 않았었다. 인플레이션, 비트코인, 바이오매스, 서브프라임모기지론 같은 건 다 통역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구분해 봤다.


용도/장소별 휴지 구분


식당(냅킨): 餐巾纸([cānjīnzhǐ] 밥 먹을 때 쓰는 휴지), 纸巾([zhǐjīn] 범용적으로 쓰는 휴지라는 단어) 

화장실(화장지): 卷纸([juànzhǐ] 두루마리 휴지), 手纸([shǒuzhǐ]용변(解手)할 때 쓰는 휴지)

미용/일상용(티슈): 面纸([miànzhǐ] 얼굴이란 뜻의 面), 抽纸([chōu zhǐ] 뽑아 쓴다는 뜻의 抽)

공용: [zhǐ], 纸巾[zhǐjīn] (복잡하고 모르겠으면 그냥 이걸 쓰면 된다!)




아무렇게나 말해도 대충 알아 들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러한 분류가 너무 흥미롭고 재밌었다. 명확해지는 과정이 좋기도 하고, 또 통역사니까 잘 알면 알수록 좋지 않은가.


자꾸 휴지에 집착하니까 변태같지만, 나는 중국의 휴지가 좋다. 그 이유이자 특징에 대해 나열해보자면!



중국 휴지의 특징

곽티슈의 곽이 종이가 아니라 비닐인 경우가 종이인 경우보다 더 많다. 비닐을 낭비하는 것과 종이를 낭비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환경에 더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비닐포장의 경우에는 부피를 차지 하지 않아 휴대가 더 간편하고 버리기도 쉽다. 


곽티슈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대중소’ 구분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곽티슈는 보통 사이즈와 미니 사이즈로 나뉘는데, 난 항상 일반 사이즈는 너무 커서 가끔 반으로 잘라서 쓰고 싶고, 미니는 너무 작은 데다가 얇아서 오히려 두 장을 쓰게 된다는 불편함을 느꼈다. 중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이즈나 '소'나 '중'인데, 두 사이즈 모두 직관적으로 너무 편리한 사이즈이다. 난 한국 회사에서늗 대체 왜 휴지를 생산해온 지난 몇 십년 동안 이 사이즈를 만들지 않고 있는지 자다가도 궁금해서 미칠 노릇이다. 

왼쪽 중 사이즈, 오른쪽 소 사이즈. 자세히 보면 각각 휴지 하단에 M과 S가 쓰여 있다.


두루마리 휴지의 경우, 휴지가 개별로 따로 포장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중국 휴지 브랜드는 vinda(维达), 칭펑(清风), 신샹인(心相印) 등이 있는데 나는 첫번째인 빈다를 자주 썼다. 한국에서는 두루마리 휴지가 들어 있는 큰 비닐을 뜯으면 그 안에 휴지가 그대로 들어가 있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큰 팩을 뜯으면 휴지들이 각각 따로 비닐 포장 된 상태로 들어가 있다. 역시 어떤 관점에서는 비닐 낭비이기도 하고, 비닐이 닿는 게 더 깨끗한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어쨌든 묘하게 위생적인 느낌이 들고 개별 관리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개별 포장되어 있는 두루마리 휴지


가성비가 상당히 좋다.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 아니 무슨 화장실 휴지가 이렇게 품질이 좋냐고 물었다. 내가 쓰던 빈다 휴지는 30위안(5000원)에 10롤이 들어 있는 휴지였는데 한국에 비해 훨씬 저렴했지만, 부드러우면서 톡톡하고, 너무 두껍지 않으면서 밀도 있어서 기분 좋게 질긴 느낌이었다. 나는 화장실 휴지가 생활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 편이기 때문에, 노르웨이에서 가장 싼 first price 휴지를 쓰며(얇고 거친 재생휴지) 슬퍼했고, 중국에서 저렴한 가격에 부드러운 휴지를 쓰며 행복해 했다. 


요즘에는 중국에도 공공장소에 거의 휴지가 구비되어 있는데, 공공장소에서 쓰는 휴지도 생각보다 품질이 좋고, 체감상 한국 공공장소에 비치된 휴지보다 훨씬 품질이 좋다. 훨씬 부드럽고 도톰하다. 


위에 열거한 대표적 브랜드 외에도 휴지 종류가 엄청나게 많아서, 크고 작은 국내 브랜드의 상품 뿐 아니라 좋은 수입 휴지도 많다. 특히 일본 nepia(妮飘) 휴지는 부드럽기가 실크 같아서, 값은 비싸지만 가끔 기분이 좋고 싶을 때 기호품처럼 사 쓰던 휴지이다. 나중에 일본에 여행을 갔는데 홋카이도 호텔에서 nepia 휴지가 있어서 혼자 어찌나 반가워 했던지. 미니소에만 가도 예쁜 휴지가 많고, 상품 종류가 계속 바뀌어서 캐릭터 휴지나 예쁜 포장 휴지를 사는 것이 나름의 재미였다.

한국 휴지와 네피아 휴지(아마 소 사이즈) 크기 비교
왠지 노르웨이 느낌이 나서, 미니소에서 샀는데 아까워서 뜯어보지도 못하고 간직하고 있는 1인(휴지 안에도 무늬가 있는 듯)




이쯤 되니 진짜 변태 같지만, 정말 휴지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 벼르고 벼른 햄통이었다. 더 하고 싶은 얘기도 많지만 이쯤 줄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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