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갬성'을 비웃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감성적일걸
젖은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수영을 마치고 막 체육센터에서 나왔다. 따릉이의 임시잠금을 풀려고 주머니를 뒤져 폰을 찾고 있는데 머리카락과 피부가 새하얀 할아버지가 핸드폰을 들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신다. 뭘 찍나 무심코 바라봤더니 아까는 미쳐보지 못했던 진분홍색과 흰색 철쭉꽃이 길을 따라 흐드러져 펴있다. 맑고 청량하지만 어딘가 순한 봄하늘과 잘 어우러지는 풍경이다. 나는 일상의 작은 틈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이런 행동을 보면 왠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겨울에서 봄으로 변하는 시기는 정말 눈 깜빡임 정도의 짧은 시간이고 사람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우리는 잠시 멈춰 봄을 느끼고 짧은 봄에 한탄하다가도 종종걸음을 치며 일상으로 돌아간다.
"어, 장난 아니야, 벚꽃이 만개했어, 정말 예뻐. 너도 이걸 봐야 하는데. 다음에는 꼭 같이 보자." 펌이 거의 풀린 긴 파마머리의 중년 여성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다정한 말을 건넨다. 비록 나에게 건넌말은 아니지만 내 마음도 봄볕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다. 그는 만개한 벚꽃을 보고 누구를 떠올렸을까? 학창 시절 같이 공부를 하며 꿈을 키웠던 친구일까? 결혼한 뒤 각자의 인생을 사느라 바쁜 동생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페달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는 또 얼마나 많은 봄꽃과 이름 모를 풀들이 생명력을 뿜어내며 존재감을 드러내는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자목련도 활짝 피고 흰 목련은 흐드러지게 피다 못해 모가지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이 아름다움은 너무나 찰나라서 안타깝고 또 눈부시다. 꽃이 피는 것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냄새 맡을 수 있다는 것, 바위에서 일광욕을 하는 이구아나들처럼 충분히 올라간 낮기온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겨울과는 급격히 양이 다른 일조량을 알게 되는 것, 변온동물들처럼 활기차지고 차약속과 술약속과 꽃놀이 약속을 잡고 봄옷을 사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 어쩌면 이 봄에 해야 하는 유일한 일 같다. 하루가 다르게 흙빛이 녹색으로 짙어지는 것을 보는 것, 물가로 드리운 앙상한 가지에 통통한 연두색이 급격히 차오르는 것, 한강을 달리는 따릉이들이 많아지고 삼삼오오 돗자리를 가지고 물가로 모이는 사람들을 보는 것 말이다.
노랗게 핀 개나리들이 다음 주면 녹색이 될 것이고 털갈이하는 것처럼 어딘가 듬성듬성하던 꽃모피가 흐드러진 분홍색으로 차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벚꽃 밑에서 슬그머니 벚꽃을 꺾어 손에 쥐거나 꽃송이를 귀에 꽂고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설렘을 느끼며 사진을 찍는다. 강아지를 모델로 놓고 이리저리 셔터를 누르며 미소를 짓고, 산책을 하는 김에 소일거리를 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은 손에 부지런히 무언가를 캐서 담는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감성을 '갬성'이라 부르면서 어딘가 비웃고 낯간지러워하기도 한다. 진지한 것을 '오그라드는 것'이라 놀리며 피하고 싶어 한다. 이 '갬성 비웃는 사회'에서 나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하지만 이봄에 깨달은 것이 있다면 '갬성'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살게 하는 것, '인생의 맛'을 전해주는 귀한 것이라는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철쭉꽃을 찍는 할아버지처럼, 만개한 벚꽃을 보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다정함을 건네는 중년여성처럼 감수성이 없으면 삶에서 우리는 무슨 소용을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각종 SNS프로필 사진이 꽃배경으로 바뀌는 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