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안에서 재밍

사람들이여 지금 아무 악기나 들고 음악을 연주합시다.

by 하뮤하뮤

“거기는 왠지 변두리의 존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것 같지 않아요?” 잼데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드럼이 말한다. “네. 분명 어떤 포털 같은 게 있는듯합니다.” 나는 동의한다.


합정역 인근에 위치한 재즈카페에서 일주일에 한 번 잼데이가 열린다. 잼데이는 곡을 미리 정해서 연습하거나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합류해 공연하는 연주형태이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연신 같은 건반을 누르며 곰방대같이 생긴 튜닝기로 업라이트 피아노 튜닝을 시작한다. 사장님의 흔들리는 긴 단발과 함께 시시시시시이이- 파파파 파아아- 소리만 침묵 속에서 30-40분간 반복된다. 무대에 쏟아지는 조명과 함께 흑백 실험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비니를 쓰고 하얀 터틀넥과 스니커즈를 매치한 할아버지는 손때 뭍은 일렉기타를 들고 오시면서 격앙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내가 요새 Miles Davis의 ‘So What’을 듣는데 구성이 아주 기가 맥혀! 명곡이야! 그런데 연주하다 보면 내가 어딜 연주하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이곡 한번 해보고 싶은데.”


사장님은 연주하면서 어딘지 모르게 되는 곡 말고 잘 아는 곡 하시라 말씀은 하시지만 트럼펫을 들고 잼세션을 이끈다. 피아노에 앉은 빨간 털 목도리를 한 고등학생은 잼이 끝난 뒤 “좋아하는 곡인데 하자고 해주셔서 좋았어요.” 싱긋 웃는다. 라테는 저러지 않았는데 말이야 참 참하다고 생각한다.


긴 파마머리를 반만 집어 핀으로 고정한 중년의 여성은 제가 한번 불러보겠다며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Misty라는 곡을 본인의 목소리범위보다 두 옥타브 높게 잡고 노래를 시작하다 B파트에서 길을 잃는다. 누군가 “지금 다시 A파트로 돌아왔어요. 네 번째 마디입니다!” 소리쳐 곡의 미로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준다.


처음 이 카페에 오게 된 건 작년인가 재작년즈음인데 같이 앙상블 할 모임을 찾다가 만난 베이스의 소개로 왔다. 어디 가서 말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그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MBTI에 과몰입해보자면) 대문자 ‘ I ’인 나를 소문자 ‘ i ’ 아니면 소문자 ‘ e ’ 성향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무슨 곡을 연주할까 묻는 질문에만 간신히 대답하고 그 외에는 고집스레 침묵을 고수하는 사람들


무대에 올라 완벽한 스윙을 하지 않으면 드럼심벌이 날아올 것 같은 조금은 살벌한 여타 잼데이와는 달리 초심자들도 부담 없이 잼세션에 참여한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일단 부딪히면서 음악과 나의 관계를 기어코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처음 만나는 연주자들은 날씨를 묻듯이 전공인지 비전공인지를 묻기도 하는데, 전공이라는 뜻은 한 평의 지하연습실에서 인고의 시간으로 지독한 입시를 거쳐 몇 개 되지 않는 밥그릇을 차지하여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운이 좋으면 부모님 등골을 브레이킹 하여 미국이나 독일,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는 옵션도 있다. 말도 잘 안 통하는데 음악도 잘해야 하는 설움을 견디지만 월드클래스에서 살아남기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돌아온 한국에서도 좁아터진 밥그릇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들었다.


어떻게든 무대에 서고 싶고 이름을 알리고 싶은 연주자들의 상황을 이용하여 페이를 쥐똥만큼 주고 그것도 모자라 체납하는 경우도 있다. 연주자들은 네임드 세션맨이 되거나 갖가지 행사에 배경음악을 생으로 제공하는 이른바 ‘행사'라는 걸 뛴다. 갖가지 장비를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하는 건 기본이고 행사의 꽃은 ‘기다림'이라고 했으니 연주자들의 휴게공간은 당연히 없어서 날씨가 궂든 어떻든 뜨는 시간은 알아서 해결하는 거라 했다.

그에 비해 나처럼 취미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밥벌이는 다른 곳에서 해오기 때문에 음악 안에서 숨 막히는 경쟁은 없다. 음악은 그저 퍽퍽하고 목마른 일상 속에 놓여 있는 믿음직한 정수기일 뿐 완벽한 연주에 대한 외부 압박도 (별로) 없다. 대신 마음은 굴뚝같지만 몰입해서 연습할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이 음악 할 동료들을 찾기 힘든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래서 돈벌이나 직장생활의 고단함을 장비를 사팔사팔(사고팔고 반복하는 것)하며 마음을 달랜다. 그러다 보면 남루한 실력에 비해 상당히 오버 스펙의 장비를 가지게 되는 ‘뮬저씨'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뮬저씨’란 국내의 음악커뮤니티 사이트이자 악기 중고거래사이트인 ‘뮬'에서 활동하며 와이프 몰래 삼사백하는 비싼 기타를 여러 대 쟁여두는 아저씨를 말한다. 이들은 하이엔드 장비를 소유할 구매력이 있어 ‘좌펜더 우깁슨’을 좌우명으로 삼고 그것도 모자라 몇 년 산 빈티지 악기를 찾기도 한다.

나는 본래 가성비를 많이 따지는 사람이라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좌펜더 우깁슨'을 달성한 뮬줌마가 되어있었다. (저가 라인이긴 하지만)


나에게 악기를 연습한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목표가 있다기보다는 연습이 주는 어떤 몰입감에 중심이 있다. 일주일 전에는 안되던 라인이 갑자기 손가락에서 술술 나올 때가 있다. 공부 자체가 보상과 같다. 평소 메트로놈과 별로 친하지 않은데 어떤 순간에 박자가 딱 맞아떨어질 때가 백만 년에 한 번 있다. 그때의 쾌감이란 금방 나온 초코크로와상 먹는 거랑 비슷하다. 그리고 ‘합주의 맛’ 그거 못 끊는다. 다른 사람의 소리와 내 소리가 합쳐져서 지금의 공간과 시간을 가득 채우고 같이 흘러가는 마법 같은 순간 말이다.


피아니스트 Chic corea는 ‘저는 다른 아티스트를 디스 하지 않아요, 그가 어떤 작품을 만들었든 그는 창조의 기쁨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고 우린 같은 곳에 머물고 있는 거니까요.’라고 하였다. 세상에 좋은 연주는 많지만 나쁜 연주는 없다. 연주를 하고 있는 사람은 창조의 기쁨을 경험하는 거고 같은 경험을 하는 우리는 모두 동료니까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복음을 전파하는 심정으로 평생 나와 함께 갈 반려악기를 집으로 들이라 권하고 싶다. ‘이것 한번 잡숴봐. 사람한테 진~짜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