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바로 뒤편 에는 학교가 있다. 무언가를 따라 읽는 소리, 합창을 하는 소리, 악기를 삑삑 대며 부는 소리, 쉬는 시간 즐겁게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오랜만에 낮잠을 길게 잤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이 떠들고 웃는 소리는 왠지 좋다. 그리고 나른하다.
나는 잠시 영화 하녀의 '김민희'가 된 것 같다. 무용한 손발을 제멋대로 늘어뜨리고 로비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김태리'가(메이드) 내 지난밤의 침대보를 돌돌 말아 쥐고 세탁기 쪽으로 종종거리면서 향한다. 잠에 덜 깬 눈을 들어 먼산을 바라보다 들고 나온 노트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창을 여는 순간 태국어를 영어로 번역한 문장이 눈앞에 보인다. "당신의 방이 준비되었습니다." 나는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 한 층을 올라 내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는 깨끗하게 세탁된 침구로 세팅되어 있고 말끔하게 바닥이며 책상이 치워져 있다. 새로 개업한 숙소를 앱으로 하루 예약하고 왔는데 (강남에서 본듯한 미인인) 숙소 주인과 태국어 번역기를 통한 흥정 끝에 운 좋게 시세보다 싸게 한 달을 머무르게 되었다. 매일 청소 서비스에 옷세탁도 무료다. 9시 근처만 되면 메이드 언니들이 빚쟁이처럼 문을 두드려대는 함정이 있긴 하지만. 평소보다 깨끗한 환경에서 마음껏 아무것도 안 하는 호사를 누린다.
처음부터 이 여행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서랍 깊숙이 어딘가 있는 여권을 한참 뒤적거리며 찾아낸 것은 비행기가 이륙하기 하루 전, 꼭 필요할 것 같은 최소한의 짐을 꾸린 건 출발 당일, 그것도 아침에 산책을 실컷 하고 와서 겨우겨우 수영복이랑 속옷 등등을 챙겼다. 노트북이랑 기타는 챙겨가야 했기에 노트북 가방에 민소매 몇 개만 쑤셔 넣고 공항으로 출발, 셀프체크인을 하고 탑승을 하려고 하는데 승무원에게 기타 기내반입을 제지받았지만 뻔뻔함과 여차저차한 과정을 통해 안전하게 짐칸에 기타를 올려두었다. 최저가를 검색해서 발권을 했더니 비행 중 물 한 모금이 없다. 당연히 밥도 없고. 바쁘게 오는 바람에 오락거리(읽을 것, 볼 것, 들을 것)도 챙기지 못했다. 별수 없이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마른 목에 침을 삼키며 좁디좁은 비행기 좌석을 견디다 보니 치앙마이공항에 도착했다. 어리바리 다른 승객들을 따라 내렸다. 입국 심사를 하는데 거의 내 차례가 되었다. 멍 때리고 있는 내 귀에 갑자기 한 무리의 중년 여성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큐알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내 차례다. 심사원은 나에게 큐알을 보여달란다. 무슨 소리지? 나는 일단 물러나 검색을 한다. 다행히 이심을 인천공항에서 신청했기에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었다. 태국 입국심사가 전자문서로 바뀌었다는 것도 몰랐다. 진땀을 흘리며 빈칸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쉬운 영어단어도 잘 기억이 안 났다. 디파쳐가 도착이었던가 출발이었던가, 아무리 애를 써도 채워야 할 칸이 끝나지 않는 기분이다. 이건 마치 수능을 보고 있는 꿈을 꾸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꿈같다. 밤 비행기여서 곧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직원들도 하나둘씩 퇴근을 한다. 내 줄에 있는 직원은 나 때문에 야근 확정이다. 죄송합니다. 나는 시계초침 소리가 들리는 방 한 군데에 홀로 남겨진 시험자처럼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음칸을 넘기고 불행하게도 오늘 야근확정인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며 겨우 입국 절차를 마쳤다.
간신히 숙소로 가서 안 오는 잠을 청하려 했으나 충전기를 안 가져온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트북 충전기만 믿고 폰 충전기나 보조배터리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아무튼 잤다. 다음날 충전기를 구하러 인근 쇼핑몰에 가서 애플매장을 못 찾아서 삼성매장에서 멀티를 샀다가 뒤늦게 애플매장을 발견한 후 환불한 건이며, 출국 시 용량이 초과되어 빼앗겼던 헤어팩이며 바디로션을 구하기 위해 드럭스토어에 갔는데 들고 있던 음료수테이크 아웃잔을 떨어트려서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던 일이며(밑 빠진 독을 막는 두꺼비 같은 심정으로 두 손으로 플라스틱잔을 쥐고 쓰레기통을 찾아 얼마나 방황했던가), 배가 고파져서 들른 푸드코트는 음식구매선불카드를 충전해야 하는 시스템인데 얼마를 충전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계산대에서 입 벌리고 약 5분간 멍 때리고 서있다가 매대에서 언니한테 한소리 들은 건이며 여행 초기에 어리바리 얼타던 걸 적으라면 데이터낭비일 듯 ㅇㅇ
치앙마이에 오게 된 건 헤쳐 모여라는 전시회에서 오프닝 또는 클로징 파티에 연주해 줄 뮤지션을 찾는다는 인스타 광고 덕분이다. 나는 그것을 핑계로 어떻게든 집순이인 현재의 나를 끄집어 내 강제로 산책시키기로 마음먹었고 한 달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자극을 받았다(이 헤쳐 모여 클로징파티에서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지만- 마이크 스탠드가 없어서 카메라 삼각대에 마이크를 칭칭 감고 삼각대 다리에 줄이 계속 부딪혀서 연주하다 가야금 소리가 자꾸 나는 것도 '헤쳐모여'스럽고 좋았다) 재즈바에서 현지 뮤지션들과 내 곡으로 같이 긱 한 것이나, 여기서 만난 친구들과 어쩌다 보니 신곡 뮤비를 촬영한 것이나, 심심하면 기타를 들고 가서 늘 가던 바에서 노래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던 것도, 20바트면 시원 아삭한 수박을 사 먹을 수 있는 것도, 어딜 가나 맛있는 커피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왜 치앙마이를 농약 같은 곳이라고 하는지 알게 되었달까
그래서 가끔은 침대에 들러붙어있는 나를 억지로 길 위에 서있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길 위에 서있을 때 더 예쁜 사람아-노래하는 앵무새깃털처럼(3월 4일에 발매될 여름스웨터란 곡 가사의 일부다.) 한국은 봄바람이 살랑살랑 분다던데 당신에게도 노래하는 앵무새 깃털처럼 포근한 날들이 이어지길 기도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