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이다.

by 하뮤하뮤

다시 돌아왔다. 봄이. 나는 맞이할 준비도 못했는데


더운 나라에서 돌아오자마자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쓰고 콜록대고 두껍게 옷을 입고 한의원과 병원을 번갈아가면서 3주를 보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날씨가 많이 좋아졌다. 이제 봄이다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언제나 그렇듯 꽃은 소리소문 없이 핀다. 또 나만 몰랐지. 봄이 이만큼 왔는 줄은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쌓였다. 노트북을 들고 좋아하는 카페로 향하며 봤다. 커다랗고 하얀 꽃잎이 벌써 지는 것을.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는 꽃망울을, 계절을 짐작할 수 없게 누구는 반팔을 누구는 패딩을 입은 사람들을, 2년인가 3년인가에 걸쳐 겨울 내내 신고 있는 검은 내 털짭크록스를 내려봤다. 여러 개 붙어있던 자비 츠는 한 개씩만 남았고 발뒤꿈치를 고정시킬 수 있는 고리도 한쪽만 남았다. 신발 뒤축의 발뒤꿈치 쪽이 닳아 있고 특히 오른쪽이 더 깎여있다.


나는 길을 가다 꽤나 정갈하게 꽃나무가 심어져 있는 오래된 아파트의 정원에서 어떤 사람이 소유한 물건을 관찰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설명서를 읽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특히 어쩌면 신발은 어떤 사람에 대한 설명이 빼곡하게 쓰여있는 저장장치가 아닐까? FW시즌의 나는 집 근처로 산책, 작업실 가기, 운동 갈 때, 카페에 갈 때 언제나 이 검은 털짭크록스를 신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1트) 신발장에는 신지도 않는 샌들 2, 슬리퍼 2, 운동화 4, 레인부츠 1, 발목이 무거운 워커 2, 발목이 무거운 플랫폼 구두 1, 높은 통굽 크록스 3, 뮬 3, 그 밖에 생각도 나지 않는 신발들이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2트) 당근을 보다가 생전 신어 본 적 없는 타입인 천으로 된 메리제인 신발이 갑자기 궁금해져서 채팅을 걸었다. 인근 역에서 거래를 하기로 약속했다. 푸른색빛이 도는 회색 벨벳으로 된 신발 색이 꼭 비둘기 가슴털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신발바닥은 거의 바닥에 붙어 있다.

당근인을 만났다. 근처에서 무나(무료 나눔)을 받고 오셨다며 기분이 좋아져 제법 상기된 얼굴로 제품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거래예정금액보다 반값으로 물건을 건네주셨다. 나는 발레토슈즈같이 납작하고 가벼운 천신발을 가방 옆구리에 꽂아 넣고 이걸 대체 언제 신는담? 하고 생각하며 비둘기 가슴털 같은 푸른색빛이 도는 회색 벨뱃을 바라봤다.


이제 검은 털 크록스는 올해 11월까지 잠시 안녕하고 이 천 메리제인을 신어볼까나. 벨벳은 겨울 느낌 천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3트) 신어보자꾸나.


이제 신발장에 신발은 자리가 없어서 겹쳐 겹쳐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4트) 아까 무릎까지 오는 워커를 발견했다. 채팅을 건다. 생전 중고로 신발을 산적이 없는데 요새 이상하게 그러하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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