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스 안에 케이스 안에 케이스
며칠 전부터 신경이 쓰였다. 위쪽과 아래쪽을 잡아주는 작은 부분이 떨어져 덜렁거리는 걸 봤다. 슬슬 이별이 올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직감을 무시하고 싶었기에 별다른 조치 없이 늘 하던 대로 행동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횡단보도를 두 개 붙여놓은 긴 횡단보도가 있다. 사이에 신호등이 하나 있고 끝지점에 신호등이 하나 더 있는 신호등 세 개짜리 횡단보도다. 건널 때 최대 28초를 주고 27초부터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걷다가 신호등 시작점에 도착하자마자 건너라는 녹색불이 지속되고 있어서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건너기 시작했다. 이때의 남은 시간은 17초였다. 1초가 남았을 때 횡단보도 도착지점에 당도했다.
이때 뭔가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철렁했다. 뒤를 돌아보니 도착하는 횡단보도 끝에서부터 4번째 칸에 놔뒹구는 머리 부분이 보인다. 망연자실하게 블루투스 이어폰을 바라보니 케이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있다. 케이스는 파스텔톤 민트색, 재질은 실리콘이다. 아끼는 케이스는 아니지만 위만 없으니 마음이 불편해져 온다. 실리콘 덮개가 없어진 에어팟케이스의 머리는 뼈가 드러난 것처럼 하얗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떨어져 나간 실리콘의 일부분 위로 벌써 몇 차례 자동차가 밟고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에어팟케이스의 케이스라는 게 처음부터 이상한 개념인 것 같다. 에어팟케이스 본체는 이미 그 자체로 블루투스이어폰을 보호하고 보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단단하고 둥근 재질로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흠집에도 강한 편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왜 여기에 껍질을 하나 더 씌워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이건 마치 주머니에 주머니를 보관하는 것과 같다. 또 인형 안에 또 다른 인형이 있는 마트료시카 같기도 하다. 마트료시카 같은 건 복과 부유함을 가져온다는 사람들의 믿음이라도 있지 에어팟케이스의 케이스는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내가 케이스에 케이스를 씌웠던 이유를 생각해 봤다. 나는 케이스에 케이스를 끼우며 소중한 이어폰이 흠집 나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불사를 기원했던 것일까, 아니면 기성품으로 나만의 개성을 더하는 전략을 통해 타인의 에어팟과 내 것을 확실하게 구분하기 위해서였을까. 두 가지 가설 모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행동이라 생각해 본다. 하지만 막상 윗덮개를 잃어버린 지금 나는 알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였다. 나는 민둥민둥한 케이스의 머리 부분을 만지며 쓸쓸한 기분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케이스의 케이스를 구매해야만 한다. 동네에 있는 다*소에 가서 아주 기본적인 투명 케이스를 사려고 했는데 두 군데 다 없었다. 대충 해결하려고 했던 꿈은 무산되고 쇼핑몰 창을 열어서 검색을 한다. 1분 안으로 가격, 디자인을 고려하여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를 마쳤다. 내 케이스의 케이스는 더 많은 케이스를 낳는 마트료시카의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