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고영신

마음 정리

by 채색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에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쓸어 담고 탁 트인 카페를 찾아 나섰다. 연말이라는 이유로 괜히 들뜬 기분 때문인지 집 근처 카페로 가기는 싫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가면 나오는 익숙한 카페를 떠올리고 잠시 주저했다. 떠오르는 얼굴을 애써 외면하고서 결국 버스에 오른다. 하얀 구름 사이로 흩어지는 볕이 내 무릎 위로 쏟아졌다. 손등을 내밀어 볕을 가리어 본다. 정확히는, 볕을 쐬어 본다. 이렇게 볕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느끼는 순간은 많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사람이 한창 붐비는 쇼핑몰이 나오고 그로부터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자주 가던 카페가 나온다. 사장님의 노래 취향이 나와 비슷해서인지, 아님 한쪽 구석에 놓아둔 물감이 굳어 나는 묘한 냄새 때문인지, 이상하게 이 카페에서는 마음이 고요해졌다. 그래서일까,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면 이 장소가 생각나곤 했다. 연말이라 평소보다 더 붐비는 인파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지나 카페 앞에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갔을 그 카페의 문고리를 잡고서, 안에 누가 있는지 눈으로 힐끔 훑었다. 아는 얼굴이 없다는 확인을 하고 난 후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 나는, 그제야 문득 억울해졌다.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떠나간 한 인연으로 인해서 방해받은 듯한 이 일상이.

처음부터 받지 않는다고 했던 소개팅이었다. 나이가 들면 사람 관계라는 것이 조금 더 명확해지고 쉬워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내 의지로 되지 않는 관계에 질릴 때 즈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거절하고 거울을 보며 이를 닦던 중, 다시 한번 핸드폰이 울렸다. 만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고, 시간을 내준다면 맛있는 밥 한번 사드리겠다는 장문의 글이 주선자의 톡으로 전달되었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나는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을 좋아했다.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상황에서 용기 낸 상대의 태도에 받아보겠다는 답변을 남겼다. 잘 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적어도 회피하는 사람은 아니겠구나 싶은, 성급한 판단에 응한 것이었다.

그 사람의 직장과 나의 직장은 지역이 같았다. 퇴근 후에 보기로 한 한식주점에, 그는 미팅이 늦게 끝났다며 예약 시간보다 한참 늦게 들어왔다. 늦어서 너무 죄송하다며 어색한 미소를 띠고 등장한 그는 웃기게도 술을 입에 대지 못했다. 나는 그가 늦게 왔다며 타박하지도, 그럴 거면 왜 주점을 예약했는지도 굳이 묻지 않았다. 반면 그는 계속해서 내게 물음표를 던졌다. 리액션을 잘해주는 나를 보고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렸는지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이었다. 주점에서 카페로 이동해 대화를 하고, 카페 마감시간이 되자 바깥을 거닐며 약 1시간 동안을 더 대화했다. 내가 그에게 물은 것은 많지 않았지만 그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직업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독서와 재즈를 사랑하며, 매주 수요일마다 축구 모임에 나가 땀을 흘리고 오는 사람이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첫 만남에 느껴졌던 다부진 모습은 그의 소신에서 기인한 고집이 반영된 것일지도 몰랐다.

나를 보며 뚝딱이던 그의 모습과 그의 취향을 함께 즐기는 내 모습이 좋았다. 이전에 9년간의 장기연애를 했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이 태어나서 연락을 가장 자주 하고 있는 편이라는 말을 듣고도, 나는 이 사람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그 사이에 미국으로의 여행 일정이 있었고 다녀온 이후에는 이사 일정이 있었다. 바쁜 그의 일정에 나도 모르게 서운하다는 말이 나갔던 때,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내게 전했다. 그리고 그에게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아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잠적했다. 분명 나는 말했었다. 회피하는 사람이 가장 싫다고.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그 상황을 회피했다. 처음 당해보는 잠수이별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카페는 그가 사는 오피스텔 바로 옆 건물의 1층에 위치했다. 그가 이곳으로 이사하는 날, 내가 자주 가는 카페라며 이곳을 소개했었다. 마냥 신났던 그때는 함께 갈 수 있는 카페가 가까운 곳에 있다며 좋아하며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예의 없이 떠나갈 사람일 줄도 모르고. 안락한 카페에서의 이유 없는 설렘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인 것도 모르고. 차라리 시간을 돌려 소개팅을 받던 그때로 돌아가 no를 외칠 걸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은 마음에 흔적을 남겼다. 그것이 내게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오감으로 경험한 기억은 나라는 사람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았다.


24년을 회고하는 글의 시작은 우울했으나 25년을 목전에 둔 글의 끝은 희망차야 하지 않을까. 좋은 기억을 되살리며 긍정 회로를 가동해 보았다. 먼저 이번 해에 오간 사람들 덕에 적어도 허전하지 않았다. 나누는 대화는 내 갇힌 시야를 넓혀 주었고 감정 소모는 심했지만 그만큼 풍성한 기쁨으로 채워주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내가 그들에게 내 마음 한켠을 내주었다는 사실도 나름대로 발전이 있는 한 해였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들 마음 한켠에 자리했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보다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도 같고 말이다.

좋은 기억은 갈무리하여 마음에 간직하고, 남기고 싶지 않은 기억은 이렇게 글로 남김으로써 마음에서 떨군다. 남기고 싶은 기억은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만 그렇게 묻어두지 못하는 나는 너덜너덜한 일기장처럼 그 기억을 헤집는 편이다. 더 이상 어떤 주관적인 감정도 남지 않도록 말이다. 가지각색의 사람을 만나 마음에 잔 생채기는 입었을지언정, 상처가 난 자리는 아물었고 여린 마음엔 굳은살이 배겼다.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 것들은 25년의 내가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이끌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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