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이유 없이, 사랑

내 편의 존재란,

by 채색


양쪽으로 서 있는 검은 나무들 사이 간신히 차 하나 지날 수 있는 길로 들어섰다. 구불구불 이어진 산자락 길 끝, 탁 트인 시야에 하이얀 눈이 내려앉은 논과 밭, 그리고 그 사이에 우뚝 선 정자가 보였다. 눈에 담긴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약 20년 전만 하더라도 명절에 부모님 따라온 아이들로 바글바글 했던 곳이었다. 지금은 명절이라 해도 차 한 두대나 오갈 뿐, 까르르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마 그 아이들도 이제 어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사느라 조부모까지 챙길 여유가 없으리라. 회사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명절에 할머니댁 방문을 스킵하곤 하는 나처럼.

시골 마을에서도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야 보이는 할머니댁. 친척들 중 우리가 첫 번째로 도착했는지 마당에 주차된 차는 없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시골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봤던 그대로였다. 검은색 기와지붕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와, 내리자마자 코 끝을 스치는 타 들어가는 장작 냄새가 할머니댁에 왔음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7남매의 보금자리였을 이곳에는 이제 할머니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있었다. 6시간이나 달려 도착한 시골집이었건만, 피곤함보다 반가움이 앞서 짐을 들고 서둘러 문을 열어젖혔다.

분명 불이 켜진 집이었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혼자 자취하던 시절,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던 것 마냥 서늘하기만 했다. 따뜻한 아랫목보다 부엌이 편하다고 말씀하시던 할머니가 생각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제야 부엌 한 구석에 이불을 덮고 누워 계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인다. 마치 그 자리가 당신의 자리인 것 마냥, 할머니는 항상 그 자리에 계셨다. 문을 너무 세게 열고 들어온 탓인지, 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뒤를 돌아보셨다.

마주 선 할머니의 모습에 철렁,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대로인 시골집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할머니는 마지막에 봤던 모습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 보였다. 주름은 더 깊어졌고, 머리는 하얗게 샜다. 아흔의 나이에도 흰머리보다 검은 머리가 많아 아직 정정하시다고 장난스레 말하던 때가 고작 3년 전이었는데. 3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나 싶은 의아함과, 회적 거리두기 탓을 하며 할머니를 보러 오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동시에 들었다. 노인들은 한해 한해가 다르다고 듣기는 했지만, 우리 가족은 아닐 거라고 외면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나이가 벌써 94세였다. 얼굴에 드리운 주름과 백발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잠깐 당황한 나와는 다르게, 할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아이고, 손주 왔냐?"

항상 전화로만 건너 듣던, 사투리가 짙게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다시 할머니를 뵐 때까지 건강하게 잘 계셔주셔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손주 왔어요, 할머니."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 옆으로 파고들었다. 이불속에 있어 따뜻해진 할머니의 손이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다, 고마워."

할머니는 전화할 때마다 말곤 하는 대사를 다시 읊기 시작했다. 바쁜 사회생활 중에도 당신을 잊지 않고 연락을 해주어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런 고마움은 가족에게 할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건만, 할머니는 꼭 그 인사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인사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엔 짠-한 울림이 퍼진다.

사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남들은 할머니 손에 길러져서 각별하다고 하건만, 나는 할머니와 딱 명절 때만 보는 사이였기에 그닥 친밀하게 부대낄 일이 없었다. 그 나이대의 분들이 모두 그러듯이, 우리 조부모님들도 남아선호사회를 거친 분들이었다. 아들, 그리고 장남을 더 예뻐하는 보수적인 옛날 사람이었고, 어린 마음에 그들을 멀리했다. 사실 다른 어르신분들보다는 열린 마음이셨던 것을 안다. 내가 원하는 대학을 붙었을 때 통 크게 용돈도 주셨었고 동네방네 자랑도 하셨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아는 어르신께서 내 소식을 듣고 여자가 좋은 대학에 가봐야 뭐하냐고 말씀하신 것과 비교하면, 우리 조부모님은 무난하셨던 편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멋쩍어하며 그들을 피하곤 했었다.


그랬던 내가 할머니와의 관계가 가까워진 것은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였다. 할아버지와 함께 지키던 집을 할머니 홀로 지키게 되었을 때. 처음엔 심심하시지 않을까 하는 안쓰러움에서 시작했다. 여러 명이 있어도 심심한 시골에서 혼자 시간을 지내셔야 한다니. 시골에 계시던 분들이야 시골에서 할 게 얼마나 많은데!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내 기준으로 시골은 tv 없이는 못 살 것 같은, 적막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가끔 할머니댁을 방문하면 친한 '척'이라도 하려고 노력했다. 명절은 일 년에 단 두 번, 그 시간이라도 옆에서 조잘조잘 말동무를 해드려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었다. 허리가 굽어 더 왜소해 보이는 할머니 옆에 앉아 할머니 손을 두 손으로 잡는데 검지 첫마디가 왼쪽으로 구부러진 것을 발견했다. "할머니, 여기 이 손가락은 왜 이래요?" "매일 나가서 낫으로 풀을 베니까. 낫을 쥐는 손가락이 고렇게 되지. 고 때는 다 고러고 살았어." 너무나 작은 손에 배어난 고단함에, 어쩌면 그때부터 할머니 삶이 궁금해진 건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할머니의 삶은,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삶과 어떻게 다를까. 거동이 불편해도 우리가 가면 바닥에 엉덩이를 붙 줄 모르던 할머니였다. 렇게 부지런한 할머니와 달리 내가 봐 온 할아버지는 좋은 모습의 가장은 아니었다. 몸을 움직인다기보단 주로 거실에 앉아 계셨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조건 것을 이루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자식들 집에 왔다가도 할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그날 밤이라도 짐을 싸들고 당신 집으로 돌아가신다며 택시를 잡아 타서 자식들 애를 태우셨고,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오토바이를 타시겠다고 우시기다가 결국엔 깁스를 하신 적도 있었다. 아무도 고집을 꺾지 못했던 황소고집 할아버지 곁에, 생각해 보면 항상 할머니가 계셨던 셈이다.


우리 할머니는 모든 것이 작았다. 키도, 손도, 발도 작았다. 키는 150cm 정도에 손은 나보다 한 개 마디정도 더 작았으며 발은 220m에 불과했다. 아마 아가씨라고 불리던 시절, 시골 마을의 요정 같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왜소하고 아담했던 할머니는 7남매를 길러냈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음을 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가부장적인 남편, 그리고 장난기 많은 자식들. 그때는 애를 낳고도 밭일을 했다며 장난스레 웃곤 하시지만,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그 굽은 손가락을 주물러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결코 할머니가 보낸 시간을 희생이라거나 고통이라는 단어로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담금질을 많이 한 철이 더 단단하다 했던가. 고단하게 살아온 할머니였지만 그만큼 내면은 단단했다. 무릎이 아파 잘 걷지 못해도 시내에 나가야 할 때는 직접 택시를 불러 마실을 나갔다 오셨고, 밭일을 해야 한다며 새벽에 일어나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오시곤 하셨다. 걱정되니 요양보호사가 가면 그때 하시라는 자식들의 걱정에도,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은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할 줄 알아야 사람이라며 할머니의 삶에 최선을 다하셨다.


나이가 나이시니만큼 점차 할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며 할머니의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안다. 오랜만에 찾아뵐 때마다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래도 아직 분명한 건, 지금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면 내 이름을 또렷이 불러준다는 사실이다. 손주만 20명이 넘는 할머니는 우리의 이름을 헷갈려하셨다. 90세가 훌쩍 넘은 연세로 보면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와 손주들 이름까지 분명하게 외우기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전화를 걸 때마다 할머니는 언니의 이름인 “채린이냐?”를 물으셨고, 나는 아무렇지 않게 정정했다. “아냐, 할머니. 채연이야, 채연이.” 한 8번은 반복했나. 횟수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는 자연스레, 그리고 또렷하게 “채연이냐?”라며 전화를 받으셨다.


시작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 우리 할머니는 내 세상에서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한다. 30살이 넘은 나임에도 여전히 내 새끼라며 엉덩이를 토닥이는 사람. 잘 먹는 내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어주는 사람. 할머니가 봐주겠다며 좋은 놈 골라 데려오라는 사람. 용돈을 드리면 뭘 이런 걸 줬냐며 꼭 두 배로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삶을 견디면서도 사랑을 주는 법을 터득한 사람. 아무 이유 없이, 내가 나인 것만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 이런 존재가 내 곁에 있음에 감사하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이별에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다음에 할머니께 전화드리면 꼭 말해야지. 나도 고마워,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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