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멀리까지 나아가기 위한 나만의 용수철 상수
침대에서 눈을 뜨며 느꼈다. 아, 이놈의 회복력. 컨디션이 좋네. 고개를 돌려 핸드폰에 뜨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40분. 몸이라도 안 좋았으면, 혹은 늦잠이라도 잤다면. 다시 고개를 돌려 아직 해가 다 뜨지 않아 거뭇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신청해 둔 10K 마라톤 당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가지 못할 이유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나는 낙심했다. 야외에서 10km는커녕, 러닝머신에서 7km를 뛰어본 것이 다였던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이 대회를 신청했을까. 그저 집과 가까운 인천에서 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주 3-4회 정도는 인터벌로나마 헬스장에서 4-5km 정도는 뛴다는 자신감으로 일단 신청하고 보았던 나를 매우 치고 싶었다. 어떤 목표가 있으면 벼락치기를 해서라도 이뤄내는 나였기에 1시간 이내로 들어오는 것 정도는 목표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흐지부지 연습도 안 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하하.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전날 꺼내 놓은 바람막이를 걸쳤다. 나가지 않을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이었지만 작게나마 자리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나가지 못할 이유가 사라졌으니 일단 발걸음을 떼고 본다는 마음이었다. 마라톤이 열리는 문학경기장은 우리 집에서 차를 타면 약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에 머리를 질끈 묶고 집 앞 슈퍼 가듯 슬렁슬렁 나온 나는 마라톤 현장 분위기에 민망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 같이 옷을 맞춰 입은 각종 러닝크루 집단과 영하 2도의 날씨에도 싱글렛만 입고 몸을 풀고 있는 경력자들. 삼삼오오 형형색색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쭈굴 해진 나는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자리를 찾아 조용히 몸을 풀었다.
약 만삼천명이 참여했다고 하는 인천국제하프마라톤. 하프를 신청한 사람들이 우르르 출발하고 나같이 10km를 신청한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출발만 20분이 넘게 걸리는 이 많은 사람들이 45,000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그것도 선착순에 들어야 참여 가능한 이 대회로 귀중한 주말 오전을 투자한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동탄에 있는 러닝크루에서 활동하는 내 친구도 이 마라톤을 신청했다고 하던데, 그 친구는 아마 집에서 7시에는 나와야 집결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득 이들을 이끄는 열정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고작 10킬로의 마라톤조차 연습하지 않았던 내게 열정의 불씨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도 있다. 그때부터 마라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참여자보다 관찰자의 시점이 되었다. 핸드폰에 깔린 런데이 어플의 가상마라톤 10km를 '처음'으로 켜고서, 앞사람들의 뒤통수를 따라 발걸음을 떼었다.
적은 키로수나마 나름 꾸준히 러닝을 해왔었지만 첫 2킬로 정도의 구간을 버티는 것은 항상 힘들었다. 시작 전 문학경기장 트랙을 도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슬쩍 탑승해 몸을 풀긴 했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심장 박동을 높이는 순간은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심장 박동에 맞추어 모든 장기를 억지로 깨우고 나면, 머리도 이제 생각을 가동한다. 너는 이걸 꼭 해야 하는 거니? 혼자 달릴 때는 이 질문에 대답을 잘 하지 못했다. 고작 3-4킬로 달리고서는 땀이 난다는 이유로 잘 달리고 있던 두 다리를 멈춰 세우곤 일쑤였다. 합리화를 잘하는 내게 이 질문을 버텨낼 만한 동기는 딱히 존재하지 않았다.
혼자 달릴 때엔 이제 그만둘까 생각하는 4킬로 지점 즈음. 나는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일정한 속도로 번갈아 가며 뻗는 다리와 앞뒤로 오가는 팔,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숨. 훕훕- 후- 예전 피티 선생님이 알려주었던 마법의 호흡법을 기억하며 실천했다. 사실 멈출 수 없었다는 것이 맞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 옆을 보면 같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데, 옆에서 내가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옆에서 달리는 사람들 덕에 내가 달리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5킬로 반환점을 돌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멈추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찾아왔다. 이제 머지않았다며, 잠시 쉬어도 좋다며 나를 유혹했다. 물을 마시며 잠깐 재정비한 나는 다시 달렸다. 오래 멈춰 있을수록 달리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보다 앞서 나가는 그토록 많은 뒤통수를 보다가, 6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 뒤를 따르게 되었다. 멈춤을 향한 강렬한 유혹 앞에서, 아주머니의 뒤통수는 나를 끌고 달렸다. '김포마라톤동호회'라고 적힌 보라색 긴팔 운동복을 입으신 아주머니는 꾸준히, 그리고 일정한 속도로 내 앞을 지켜주었다. 1킬로 정도를 그렇게 따라갔을까. 아주머니만 따라가면 내가 완주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그분을 놓칠 수가 없었다. 얼굴도 모르고 뒤통수만 보며 가는데, 사람에게 그렇게 의지할 수 있을까.
8킬로 즈음, 다시 지하차도와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집 근처라 매번 차를 타고 수월하게 이동하던 길을 내가 직접, 내 다리를 움직여 지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미 체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에서 오르막길은 쉽지 않았다. 호흡을 고른답시고 잠깐 멈춘 순간, 내 눈앞에서 보라색 티셔츠의 아주머니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야근 중에도 꾸준히 운동을 다니는 이유 중 하나가 체력 증진을 위해서였건만, 체력이 모자라 엄마 나이뻘인 아주머니를 따라갈 수 없었다는 사실에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 밀려왔다. 다시금 달리기 시작하려는데, 와, 그때부터 온몸의 감각들이 달리기를 거절했다. 달릴 힘은 있었는데, 그냥 싫었다.
사람들은 마라톤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했다. 정말 힘이 들면 나 스스로에 집중을 하게 된다고. 그래서 내 몸을 달랬다. 채연아, 이제부턴 너와 나의 싸움이야. 조금만 더 달리자. 그러나, 이게 되는 사람이면 난 혼자서도 10킬로를 달렸을 것이다. 내 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나랑 이겨서 네가 얻는 게 뭔데?라는 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와 싸워서 얻어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해냈다는 성취감, 그 정도? 이것에 동기를 얻지 못한다면, 내 몸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너 여기서 걸으면 남들에게 기록 말할 수 있겠어? 그 정도로 만족해? 나는 남들과의 경쟁에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존심은 어쩜 이리 센지. 분명 완주 하나만 목표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좋은 기록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욕심이 생겼고, 이것은 내게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업힐 구간이 반복되는 구간에서, 그제야 내 발목은 힘을 주고 다리를 밀어주었다.
정확히는 10킬로 400미터. 1시간 5분 40초라는 기록으로 피니시라인을 통과했다. 통과하는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주했다고, 내가 신청한 것에 대해 책임을 졌다고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기록도 나름 처음 뛰어본 것치고 만족스러웠다. 1시간 20분 정도를 생각했던 내게는 생각보다 좋은 기록이었다. 중간에 아주머니를 놓치지만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걸로 만족했다. 피니시라인을 통과하고서 잔디밭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잠시 쳐다보고 발걸음을 떼었다. 원체 서맥이 심한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나면 언제 뛰었냐는 듯 차분해졌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달릴 때는 몰랐던 찬 바람이 다리에 스치며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올 때와 비슷한 차림이었지만 게토레이와 빵 한 개, 그리고 완주 메달이 든 봉투 하나가 손에 들려 있었다. 관찰자의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경기 중간부터는 참여자로서 임했던 나는 이제야 같이 달린 사람들의 열정의 근원이 무엇일지, 내게 열정의 불씨를 던질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자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모르는 사람들과의 연대,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심리.
연대와 경쟁이라. 생각하면 참 모순적인 단어긴 한데, 타인 없이는 성립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사실 난 경쟁에 강하다고 하지만 경쟁을 싫어했다. 경쟁의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경쟁하는 상황 자체를 벗어나려 했었다. 경쟁은 삶에 연속적으로 등장하곤 하는 익숙한 것들이었는데 연대란 그리 흔하게 마주하지 못했다. 같은 반 친구들과의 체육대회 응원전, 학생회 친구들과의 대동제. 손에 꼽으니 순간순간이 기억이 난다. 대회가 주는 교훈은 이거였다.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대와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 결론적으로 나는, 나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경쟁이 지겹다고 그것을 회피하기만 해서는 안되었고, 사람들과 연대하는 순간을 더 만들고 느껴야 했다.
항상 내가 더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싶었다. Spring constant. 용수철을 늘리기 위한 일정한 힘을 표시한 상수라고 한다. 더 멀리까지 도약하고 싶은 나의 용수철 상수는, 오늘부터 연대와 경쟁의 적절한 균형이다. 이번 봄, 우연한 도전이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되어준 기분이었다. 어쩌면 알면서 회피했던 것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마음에 조금은 여유가 생긴 지금, 서로를 밀어내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하며 더 먼 거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