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감성 사이
나는 여의도 벚꽃을 봐야 봄이 온 것 같더라. 그 특유의 냄새가 있어. 여의도 봄꽃냄새.
저마다 봄을 맞이하는 방식은 다 다르겠지만 내 봄맞이 방식은 이랬다. 여의도 가서 벚꽃 보기. 바글거리는 사람에 치일지라도, 매년 열리는 뻔하디 뻔한 여의도 한강 벚꽃놀이를 가야 했다. 한강에 부는 활기찬 바람에 자디잘게 스민 꽃향기가 내게는 봄이었다. 대학생 때 맞은 풋풋한 시절의 봄이 계속 생각나서 그랬을까. 이상하게 집 근처에서 보는 벚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럼 가자, 여의도.
밤 11시였다. 지금?이라고 되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 벚꽃만 벚꽃이냐고, 왜 한강 벚꽃을 봐야 봄이냐고 단 한 마디의 질문도 없이. 너만 괜찮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차를 끌고 가겠다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일이 주말이라면 신나게 일어나겠는데 평일이었고 직장인인 우리는 출근을 해야 했다. 괜찮을까. 망설이는 기색이 느껴지자 그가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봄이 온 걸 느끼려면 가야지, 지금. 나보다 잠도 많고 침대에 누워 있는 걸 좋아하는 그가 잡아 끄니 할 말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고선 그가 잡은 손에 이끌리듯 따랐다.
여의도 한강공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이나 차는 드물었다. 창문을 열고 찬 바람을 맞으며 도로 중간중간에 피어난 아기 벚꽃나무를 보면서도 탄성을 내질렀다. 눈을 감고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오는 봄내음을 맡았다. 그가 챙겨 온 두툼한 패딩을 꽁꽁 둘러싼 채로, 나는 봄을 맞았다. 나도 모르게 와, 너무 좋아.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행복해하는 나를 눈에 담는 그가 있었다. 옅은 갈색의 눈이 둥글게 휘며 곡선을 그린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땐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잔뜩 긴장해 앉아있는 내 뒤로 쌍꺼풀이 진한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지났다. 헐렁한 회색 후드티에 물 빠진 듯한 청바지를 입은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주변 선배들과 장난을 쳤다. 저분은 누구야? 아, 원래 여기 계시다가 이번에 다른 부서로 가셨어. 팀원들과 친했던 그는 우리 부서에 자주 놀러 와 장난을 나누었다. 딱히 그와 친분이 없던 나는 그저 옆에서 듣고 함께 웃기에 그쳤다. 부서에 자주 놀러 와 편해질 만도 한데, 이상하게 그가 어려웠다. 남들은 하하 호호 잘만 장난치던데, 나는 그와 있으면 잘 움직이던 팔다리가 뚝딱댔고, 스스로가 민망해져 얼굴이 달아오르곤 했다.
그와 접점이 생긴 건 팀 회식 자리에서였다. 우연히 대각선에 앉게 되었지만 그와 어색했던 나는 그가 앉은 쪽으로 눈도 돌리지 않았고 반대 방향의 사람들과 열심히 술을 마시고 까르르 댔다. 당시 간과한 것은 한 달에 한번 있는 그날이라는 사실이었다. 술이 깨며 서서히 허리가 두 동강 나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하얗게 질린 안색에 굳어버린 입꼬리를 보고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 팀원들이 나를 챙긴답시고 그 사람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채연이 너랑 집 방향 같으니까 집까지 데려다주고 가. 하필 그 사람과 집 방향이 같았나 보다. 아, 아니에요. 저 때문에 중간에 나오실 필요 없어요. 불편한 마음에 나름 손사래를 쳐봤지만 이미 그는 내 안색을 보고 짐을 챙기고 있었다.
택시 타고 갈까?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린 나는 배려하는 듯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15분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지만 집에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 택시에서 뛰쳐나오듯 집에 들어가서 다음날 머리를 싸맸다. 그와 첫 대화였는데, 술 많이 마시고 컨디션 조절 실패한 신규가 되어 버렸네. 진상 후배로 기억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회사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데 메신저 창이 번쩍인다. 잘 들어갔어? 어제 너무 안 좋아 보이던데. 그의 이름이 눈에 보이자 죄를 지은 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못한 게 있어서, 찔리는 게 있어서. 그땐 그렇게 그 신경쓰임을 합리화했었다.
공무원으로 첫 6개월이 지나 시보해제가 된 날, 그에게 메신저가 왔다. 잠깐 시간되면 커피 마실래? 동료끼리 커피 마시는 거야 흔한 일이니까, 알겠다고 하며 내려갔다. 항상 마시던 아이스아메리카노 2잔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는 그의 손에는 스타벅스 시티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이제 정식 공무원이라며 축하한다고 건네는 선물이었다. 이제 잘못한 게 있어도 안 잘리겠네, 후배님. 장난기 섞인 그의 목소리가 왜 평소보다 특별하게 느껴지는지, 항상 후드랑 맨투맨만 입고 다니던 사람이 오늘은 왜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왔는지, 옆에 앉은 사수도 안 주는 선물을 왜 당신이 하는지. 이해되는 것은 없었고, 그의 모습에 괜스레 설레는 나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신입생 때는 복학생을 조심하고 신규직원일 때는 일 알려주는 선배를 조심하라고 했던가. 근데 아마, 이번엔 반대로 선배가 신규를 조심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말에 초과근무를 하러 나온 그와 우연히 만나 볼링을 쳤고 영화를 보았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그가 무려 나보다 9살이 많은 것도 알게 되었다. 도둑놈이네! 그는 내 나이를 알고 있었을 텐데. 속으로 속삭였지만, 사실 나이가 많다고 만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미래를 생각하며 상대를 만나기에 어린 나이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나에 대한 감정을 고백했을 때, 난 결혼 생각이 없는데 괜찮아요?라고 여지는 남겨 두었으니. 바보 같던 그는 어차피 결혼은 생각하지 않았다며,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그의 차를 타고 같이 출근했고, 그의 차를 타고 퇴근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는 사내연애였다.
그저 느낌만으로 사랑했던 그는, 모범생이라 불리며 자란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공부보다는 오락이 중심이 되는 시골에서 자라며 고등학생 때부터 술과 담배를 접했고, 운전대도 잡았더란다. 대학교도 성향에 맞지 않는다며 중퇴. 현재의 공무원이라는 신분은 나와 같았지만 살아온 과정은 달랐다. 오빠 담배 다시 피워? 차에서 발견된 전자담배 하나가 불씨가 되었다. 흡연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 때문에 그는 피우던 담배를 끊었었다. 나와는 다른 모습이 한때는 매력이었는데, 이제는 그 모습이 멀어질 사유가 되어 버렸다. 전자담배를 보고 목소리가 가라앉은 나를 눈치챘는지, 그는 친구가 탔을 때 두고 내린 거라며 변명을 시작한다. 그것이 진짜였는지, 변명이었는지 내게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헤어질 이유가 필요했을지도 모르니까.
걔 왜 이렇게 요즘 살이 빠졌어. 힘든 일 있대? 사내연애의 단점은 헤어지고 나서도 상대의 소식을 계속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필 주변 사람들이 그와 친하다 보니 나와의 관계를 모르던 사람들은 그를 소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왜 그렇게 감당도 못할 정도로 나를 사랑했대. 바보 같은 사람. 퇴근 길에 회사 1층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쳤을 때 간단히 목례를 하고 그의 눈을 피했다. 바람이 선선히 부는 봄날 저녁이었다. 아마 그로부터 1년 전의 그가 밤벚꽃을 보러 가자고 했던 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30분. 바람에 실려오는 봄내음을 맡으려 노력하며 길을 걸었다. 15분쯤 걸었을까. 횡단보도에 서 있던 내 몸이 누군가에 의해 돌려졌다. 내 팔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그였다. 그 순간을 기억한다. 내가 걸어온 길을 달려와 나를 보던 그의 얼굴을, 그리고 그가 한 말을. 한 번만, 딱 한 번만 나 보고 웃는 얼굴 다시 보고 싶어서.
마음에 나를 넘치게 담았던 그는, 비워내는 걸 어려워했다. 처음 그에게 느꼈던 어려움은 사람에게 상처받는 걸 싫어했던 그가 쌓아 올렸던 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얼굴은 무섭게 생겨가지고 마음은 왜 그렇게 여린 건지. 왜 9살 어린 나보다 감정을 감추는 데 미숙한 것인지. 사실 내가 그때 어떤 액션을 취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바보 같다고 했던 건 기억난다. 그리고 그 허탈한 미소에 그가 조금은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았던 역까지 그를 데려다주며 등을 토닥였다. 밥 잘 챙겨 먹고 친구들이랑 놀면서 나를 점차 잊어내라고. 시간이 약이라고.
감정보다 이성이 강한 나였기에, 만나면 안되는 이유들을 나열하며 그에 대한 감정을 진작 떨쳤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엄마에게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엄마가 멈칫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삼 남매 중 가장 똑부러진 자식이었기에 내가 데려올 사람은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환경과 차이나는 나이. 개방적인 엄마도 멈칫할 정도면 보수적인 아빠는 쌍수 들고 반대할 사람이었다. 연애의 끝을 축복으로 맞이하고 싶던 내겐 그것만으로 그 사람과 멀어질 이유가 되었다. 내가 확신이 들면 부모님을 설득시키면 된다는데, 참 웃기는 일이다. 솔직한 마음으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 사람과 만나며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또 이 사람이라 결혼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찾아왔다.
그와의 시간 속에서 악역은 나였을지 몰라도, 더 오래 그 시간을 기억할 사람은 나일 것이다. 나보다 내 행복을 더 우선시했던 사람이 준 선물 같은 기억이니까. 그 때로부터 시간이 훌쩍 흐른 지금, 그가 또 다른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을 건너 들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요상하다가 시간이 지나자 제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밖에 할 수 없는 부질없는 기도였지만 이번 봄, 밤 벚꽃 아래에서 읊어보았다. 부디 이번에 만나는 상대는 끝까지 그의 곁에서 웃어줄 수 있기를, 그가 다시는 아프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