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연스럽게 접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이름은 춘화, 봄 춘(春)에 꽃 화(花)를 썼다. 봄의 꽃이라는 뜻이었지만 정작 그녀의 생일은 여름이었다. 그것도 해가 쨍쨍 내리쬐는 양력 7월 말, 음력으로 하면 9월 초. 왜 그녀의 이름이 봄에 피는 꽃이 되었을까. 그녀에게 이름의 뜻을 물어보니 그녀도 고개를 갸웃한다. “글쎄. 그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나 보지, 뭐.” 그 당시 이름이 미자, 영숙 같은 이름이 유행이었다고 하니 확실히 당시 흔하지 않은 이름인 것은 맞았다. 나름 부모님께서 공들여 지은 이름이라는 뜻이었다.
이름에 공을 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그녀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고명딸이었다. 그것도 위로 아들이 둘인 집에 토끼 같은 막내딸. 그녀의 오빠들이 모두 키가 180cm가 넘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는 꽤나 건장한 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으리으리한 기와집이라는 단어에서도 느껴지듯, 그녀의 집에는 돈이 많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그 근처 마을의 집을 모두 그가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항상 집에 현금이 끊이지 않았는데, 뭐, 그녀의 말을 빌리면 벽장을 열면 돈이 그득그득했다고 한다. 돈이 필요하면 벽장을 열고 한두 장 가져가도 아무도 모를 정도라고. 말 그대로 부족한 것이 없었다. 행복에도 조건이 따른다. 건강, 금전, 사랑. 그녀가 행복해지기에 그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글쎄, 행복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던가. 불화는 그녀의 부모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바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부모님은 장남에게 어떠한 것도 시키려고 하지를 않았다. 다 큰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를 시키려고 하면 "갸는 못햐. 그런 거 모를턴디."라는 말로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어떤 고민이 있을 때도 장남에게 연락 한번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작은 오빠에게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같은 형제간 의리가 상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의 싸움에는 부모님의 재산과 관련한 암묵적인 경쟁 심리도 작동했을 것이다. 누가 더 많은 지원을 받느냐.
그 싸움에 그녀도 낄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싸움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자격이 없던 사람처럼,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봐야 할 뿐이었다. 부모님은 그녀가 출가외인이라며 마치 연도 끊은 양 재산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종종 그녀는 내게 부모님이 너무하다는 말을 하곤 했었다. 그녀가 결혼 당시 돈이 부족해 단칸방부터 시작할 때에도 그녀의 부모님은 오빠들에게는 퍼주던 재산을 단 한 푼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봐도 너무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 생각을 그녀에게 옮기지는 않았다. 그녀 내면의 괴로움이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입으로는 너무하다고 내뱉었지만, 그녀는 부모님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몇 달 정도 흘렀을까. 그녀의 마음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이겼다는 것쯤은, 그녀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이 사는 전라북도 임실까지는 그녀가 사는 인천으로부터 약 270km. 먼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매달 부모님 댁을 방문했다. 매일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며 부족한 것은 없냐 질문했고 익숙해진 부모는 '알아서 잘하는' 그녀에게 이것 사 와라, 저것 사 와라, 이번엔 이게 고장 났다, 주문했다. 원스톱 서비스라도 되는 양, 주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번엔 그녀의 남편이 이 상황에 불만을 품었다. 그렇게 재산을 퍼주던 아들들은 어디 가고 딸과 사위만 불러대냐고. 사실 이것도 뒤에서 내가 들은 이야기였다. 그는 절대 그녀의 앞에서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녀가 속상해할 것이 뻔하니까.
요상하게 찜찜한 한 주가 흘렀다. 타 부서로의 발령을 그토록 고대하던 내가 꿈을 이룬 그날 밤. 잔업을 처리하고 인수인계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발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쌓인 정이 많은 만큼 아쉬움도 남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남아 다시 마우스에 손을 올렸다. 얼른 잔업을 처리하려 했건만, 꼭 집중하려 하면 방해물이 나타나기 마련. '지잉-' 울려대는 핸드폰에 뜨는 이름을 확인했다. 언니였다. 평소 용건이 있을 때만 전화하는 사이라 떨떠름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야, 외할아버지 돌아가셨대. 준비해서 수원역으로 와."
찜찜한 기분은 단순히 회사 업무 때문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저번 주, 엄마는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들어간다며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도 풍으로 한쪽 마비가 있으셨던 상황에서 갑작스레 폐렴이 찾아와 병원에 입원하시게 된 것이었다. 간병인이 없다는 소리에 엄마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 전주 어느 병원으로 출발했다. 며칠만 입원하시면 된다 해서 간신히 퇴원 수속을 마쳤다지만,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더 모시기엔 무리가 있어 요양병원으로 옮겨지셨다. 엄마가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고 왔을 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눈을 뜨신 곳이 병실임을 인지하자, 눈을 꼬옥 감고 다시 뜨지 않으셨다고. 건강하셨던 시절, 요양병원은 죽어도 싫다 하던 분이셨으니 그 반응은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마치 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이.
이미 한바탕 슬픔이 지나간 장례식장은 고요했다. 이미 눈물을 쏟아 내어 눈이 퉁퉁 부은 어른들이 마른 소리를 내며 우릴 맞이했다. 당연하게도 엄마의 눈 또한 빨간 실핏줄이 드러나 보였다. 안그래도 걱정이 있을 때마다 바싹 마르는 엄마였는데, 검은색 상복을 걸친 어깨가 유독 작아 보였다. 언제 이렇게 작아졌나. 엄마의 어깨를 한쪽 팔로 감싸 안고서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영정사진 속, 평온해 보이는 외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쳐 맘 속으로 덤덤히 인사를 건네 보았다. 오랜만이에요, 할아버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슬픔 없이 자리한 내가 문득 불경한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합리화를 해보기로 했다. 내게 외조부는 "여자가 좋은 대학 가봤자 뭐하냐."라는 납득하지 못할 망언을 한 사람이었으니까. 가끔 보여 주었던 인자한 미소 뒤에 그런 말을 하셨다는 사실이 오히려 배신감으로 다가와 성인이 된 직후 찾아뵙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가, 그와 내게는 딱히 애정의 연결선이 없었다.
한적한 오전 시간대에 멀찍이 앉아 찾아오는 시골 어르신들과 엄마를 번갈아 구경했다. 얼굴도 모르는 어르신들을 보며 삼촌, 고모 불러 가며 연신 이야기꽃을 싹 틔우고 있었다. 옛 기억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도란도란 자리를 함께 했다. 이가네 막둥이 딸이었던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해사했다. 사회의 쓴 맛을 본 지금도 사람을 좋아했고 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설거지하는 엄마의 옆에 가 옆구리를 툭 건드려도, 집 앞 카페에서 생각나서 사 왔다고 건네는 쿠키 하나에도, 자다 깨 엄마의 옆자리에 조용히 드러누워도 엄마는 웃었다. 동네 친구들과도 전화를 하기 시작하면 작은 주제 하나에도 진심을 다해 반응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커서도 티가 난다는데, 아마 그녀의 미소는 그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슬픔에 내게 다가온 것은 외할아버지의 입관식 때였다. 유리 건너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를 멍하니 쳐다보던 나를 깨운 것은, 엄마의 마지막 인사였다. "아빠, 나 아빠 덕분에 많이 사랑받았어. 너무 보고 싶어. 보고 싶을 거야, 아빠. 사랑해." 슬픔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엄마는 그녀의 아빠에게 작별을 고했다. 우리 삼 남매가 간 이후로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엄마는 사랑을 주었던 아빠 앞에서 무너졌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건. 정확히 할아버지에 대한 애도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엄마는 그녀의 아빠를 향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다지만, 그 자리에서 흘린 내 눈물은 엄마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외할아버지에게 내 소원을 빌었다. 제발 그곳에서 평온하시라고, 그래야 우리 엄마 발 뻗고 주무실 거라고.
외할아버지가 외손녀의 소원을 들어주시려나 모르겠다. 얼굴도 비추지 않다가 갑작스레 입관식에 나타나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게 평온해 달라는 소원을 비는 외손녀라니. 나라면 어이가 없을 것도 같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두 손을 모았다. 그래도 딸의 이름을 봄꽃이라 유난스레 짓고, 그렇게 해사한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랑을 주었던 할아버지라면, 괘씸한 손녀 소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실 것 같아서. 그리고 왜인지 더 든든하실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