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아 Oct 22. 2020

들어보니까 두 분 말씀이 다 맞네요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호랑이 기운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바로 업무와 관련해 직장 동료와 문제가 생겼을 때다.

본인의 태몽이 호랑이였거나, 고려대를 졸업했다면 아마 조금 유리할 것이다.




거시적으로는 정치권에서부터 일개 회사의 말단 신입 사원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은 누가 어디까지의 책임을 지는가의 싸움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지만, 날선 말들의 중심에는 대부분 문제와 상황에 대한 책임 회피 의식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아니, 그러면 저는 하루종일 이 업무만 해요?”



상대방의 문장이 높은 톤과 아니꼬운 느낌의 ‘아니-’로 시작했는가? 

필시 현 상황에서 본인의 책임을 지우고자 애쓰는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발언에 합리적으로 구구절절 무언가를 설명해봤자, 그가 만든 게임에 빠질 가능성만 높아진다.


차라리 간결해져라.



“그럼 이 업무가 제 업무인가요?”



조금 거칠긴 하지만 이런 날선 대화는 은연 중에 서로의 불가침한 영역을 넌지시 일러준다. 동시에 이는 내가 맡은 일의 절차와 부서 내 업무 분배를 보다 합리적인 편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생각보다 직장 내에선 이런 대화가 꼭 필요한 편이다. 나와 그리고 너의 생존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던가!

톤이 높은 대화에는 으레 제3자가 끼어드는 법이다.


“제가 들어보니까, 두 분 말씀이 다 일리가 있고 맞는 것 같아요~너무 싸우지들 마시고 잘 해결해보세요.”




아유, 진짜 밥맛이다.

무척이나 인자한 그는 사실상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았으면서, 이미 모든 것을 해결한 듯한 톤을 쓴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기계적 합의 내지는 중립에 알러지가 있다.


급식실 공사로 잠시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 생각난다.
맛있는 반찬을 두고 싸움이 일어나면, 담임 선생님께서는 다툼을 일으킨 둘에게 꿀밤을 먹이시고는 강제로 반찬을 나눠먹게 하셨다. 한 아이에게는 비참한 전리품이었고, 또 다른 아이에겐 비합리적인 강탈이었다. 실패한 교육이었다.


양측의 입장에 모두 긍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난이도 자체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냥 둘 다 그렇다고 해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이 말에 대체 어떤 어려움이 있나.



차라리 양비론자가 낫다.

양비론자는 문장을 시작해 마침표는 찍지 않는 비겁함과는 거리가 있다.


제 3자는 해당 업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다. 그러니 말이 그렇게 편하게 나온다.

논의의 ‘해결’이 아니라, 논의의 ‘종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업무에 관한 논쟁은 존재 자체로 갖는 의미가 크다. 1, 2년 정도 일하고 퇴사 할 회사가 아니라면, 업무의 어느선까지가 나의 책임인지를 설정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면, 당신은 월급은 똑같은데 항상 혼자 남아 야근을 하는 능력 없는 부서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근래의 시대에는 야근도 직장 내 미덕이 아니다. 또한 애당초 월급 받는 직원끼리 이런 싸움을 할 필요가 없게끔 초창기의 업무 분화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잘 이루어졌는지는, 업무 문화의 건강함과 매우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



그러니, 차라리 저런 말을 한 사람에게는 고개 조차 돌려주지 않는 편이 좋다.

당신은 우선 당신의 싸움을 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