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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들 Oct 21. 2015

빨래를 하려는 다짐

20대 중반, 반복되는, 무기력을 돌려버리자

집에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앉아 참치 김밥 한 줄을 뚝딱 먹어치웠다. 오늘 공기 중 미세먼지농도가 굉장했다던데, 자면서도 미세먼지를 들이마시게 됐구나 싶다.


코인세탁을 하려고 모아둔 빨랫감은 몇주째 그대로이고, 손빨래 해야한다며 따로 빼둔 흰색 셔츠들과 스타킹도 그냥 그렇게 있다. 방금 다 먹은 김밥을 싸두었던 호일과 흰봉지가 침대 위에 굴러다니는 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왜이렇게 게을러졌는지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나는 원래 빨래를 일주일에 세 번은 돌리고 청소도 두 번 이상 하던 사람인데. 뭐 물론, 사실 내가 학업에 있어서는 참 오래 전부터 게을렀던 것이 맞지마는 생활 전반에서 이렇게 둔하게 굴면서 스스로도 놀라는 웃기는 상황을 연출한 것은 분명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그러다가 문득, 눈알을 좌우로 조금만 굴리면 방 전경을 모두 볼 수 있는 이 조그마한 집에서 멋지게 살아봤자 그것이 얼마나 멋지겠는가 하는 생각도 한다. 자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취는 이런 것이 아니었고, 20대 중반의 내 처지도 이런 것이 아니었으며, 어른이 된 이후의 몸매나 옷장에 든 옷들마저도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능력'이란 또각거리는 구두를 신고 뉴요커처럼 도심과 사무실을 활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방세를 내고 밥을 먹고 살면서 때때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마저도 가능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다음 달이면 이 방보다 약간이지만 넓고 커다란 창이 있어 채광도 잘 되며 대부분의 가구들이 빌트인으로 갖추어져 있는 보다 좋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 8할은 운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여튼 다들 잘 되었다고 이야기해준다. 나는 그 곳에 가면 새 책장과 책상을 들여놓은 후 채광을 조절하고 사생활을 보호해줄 블라인드도 설치할 것이다. 내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제대로 된 싱글라이프'의 일부를 실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그 새로운 몇 가지가 나의 삶을 색다르게 바꿔 놓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고작 26년 산 것 뿐이지만, 나는 요즘 매 순간이 하나의 화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내 인생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다고 말이다. 어떤 때이든 지나치게 호들갑 떨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는 요즘 별다른 걱정이 없다. 10대 내내, 심지어 대학생 때까지 불성실의 아이콘으로 눈초리를 받던 학생이었고, 돈 천원이 없어 허덕이던 가엾은 청춘이었지만 어떻게든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또 그렇게는 안 살아야 하겠지만.)다만, 한 가지, 나에게서 느껴지는 이 무기력만은 분명 걱정이다. 이 흐린 정신과 눈이 문제다.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무겁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어떤 의미가 될 지 알 수 없다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왜 이렇게 짧은 하루를 더 짧게 보내버리는지.

내일은 꼭 빨래를 돌리고, 필요한 일 몇가지를 더 하려고 한다. 그리고 집에 오면 옷부터 갈아입어야지. 왠지 모르게 중요한 것을 다짐하는 마음이 든다. 그것들과 함께 내일부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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