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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Apr 29. 2024

언니, 내 인생이 '묘사'인 적이 있었어.



언니,

내인생이 묘사인적이 있었어.

그저 시간순대로 나열된 서사가 아닌 묘사말이야.

그땐 모든것이 선명했어. 마치 채도를 잔뜩올린 jpg파일처럼 내 마음의 폴더에 모든 묘사가 쌓여갔지.

한순간 한순간은 찰나가 아닌 영원이 되어 내 마음의 판화로 남았어.

작은 숲에서 함께 들었던 새소리, 함께 달렸던 강변의 산책로, 그때의 윤슬,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책을 봤던 시립 도서관의 구석진 소파. 스트롱 한개로 나누어 마시던 딸기 쥬스의 까슬한 감촉. 깍지를 끼면 느껴지던 중지와 검지사이의 단단한 굳은살까지.


묘사가 주인공이었던 찰나엔 서사는 더뎠어. 서사가 더딘 인생은 묘사로 가득찼고.

서사가 더뎌 지루하진 않았냐고?

아니 언니. 언니도 순수소설을 좋아하지? 대중소설이 아닌 묘사로 가득찬 순수소설말이야.

그게 삶에 내려앉았다고 생각해봐. 세밀화가 가득한 찰나의 순간들말이야.

그건 언니의 눈을 멀게할수도 있을거야.


그런데 언니. 문득.

서사만 남았지.

묘사는 묘사에 불과했던거야.

말 그대로 묘사였던거야. 묘사는 주관적이잖아. 흘러가고 있던 서사는 나에게 서늘한 미소를 날렸어.

왜 이제 왔냐는 듯이.


묘사의 필터가 걷힌뒤의 서사는 빠르게 전개되더라.

서사가 빠르다고해서 나쁘지는 않아. 어찌보면 그게 인생이니까. 서사가 인생이지 묘사는 양념이라고 어느 교수님이 말씀하셨거든.


횡설수설해 미안해 언니.


결론은 그거야.

결국 서사만이 객관적이며 불변하다는것 말이야. 그걸 깨우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어

벌써 불혹의 나이를 훌쩍 지났는데도 삶에 실망하고 툭툭털고 일어나는 꼴이라니.

온 몸에 진흙이 묻어 잘 털리지도 않아. 드라이기로 한참 말린뒤에 탁탁 쳐내야할것같아.

이렇게 또 묘사를 하고있지만. 결국 난 또 같은실수를 반복하는 멍청이라는 사실. 이것이 서사지.


언니, 내가하는말에 너무 실망하지는마.

내 인생에 묘사는 분명히 또 찾아올거야.

다만 그때는 착각하지 않으려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묘사에 빠져 서사가 흘러가고 있다는것을 놓치는

우매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새로운 묘사를 할 준비가 되어있어. 언니도 그랬던 것처럼.


묘사와 서사가 한몸처럼 뒤엉킨, 그런 균형있는 아름다운 소설.

내 삶도 그런 소설이 될수 있을거야. 생장하는게 아니라 성장하는, 성장하는게 아니라 성숙하는

그런 삶이 될수 있을거야. 언니의 인생처럼.


언니,

따뜻한 봄이가기전에 나와 함께 등을 맞대고 책을 읽지 않을래?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노곤하게 말이야.

등으로 전해지는 서로의 영혼을 느끼며 잠시 나에게 묘사가 되어주지 않을래? 여름이 오기전에.

따듯한 커피와 서사로 가득한 책은 내가 준비해갈게.

그렇게. 우리 곧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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