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Jun 09. 2024

뮤즈와 이별했다

글을 쓰는 그대들에게.


왼손 중지와 약지 사이에 한포진이 도지기 시작했다. 나의 심경변화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녀석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조금만 신경 쓸 일이 생기면 꼭 그 자리에 오돌톨톨한 수포들이 자리 잡는다.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가렵다고 긁었다간 피를 본다. 그렇다고 그냥 두기엔 존재감이 꽤 크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손가락사이로 엄지가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한포진은 19시쯤 시작됐다. 신인상 투고를 한 여러 곳 중 한 곳에서 수상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이다. 공교롭게 같은 시로 등단을 하였는데, 수상까지 겹치면서 포지션이 애매하게 되었다. 

양쪽 단체에 전화를 거느라 진땀을 뺐다. 양쪽 대표들의 許를 받고 이제야 자리에 앉았다. 해결됐기에 망정이지 소심병환자는 오늘 날밤을 샐 뻔했다. 


오늘의 서글픈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수상 소식 전화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고여있던 웅덩이의 물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고백하기 위해 고민고민하며 몇 시간을 커서 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뮤즈와 이별한 것 같다.

그 뮤즈가 그대들이든, 그것들이든 간에 (혹은 그것이 과거의 나 자신일지라도) 그것이 나를 통과하여 지나갔음을, 혹은 고갈되었음을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다.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나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준 이 증상? 은 몇 주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 


아주 솔직하게 접근하자면

1. 브런치에 작성하는 글의 방향성이 흔들릴 정도이다. 내가 요즘 도대체 무슨 글을 쓰나 싶다.

2. 뮤즈와의 이별로 나는 텅 비어있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쓰지 않으면 내 본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어리석은 혹은 조급한 생각이 든다. 

3. 그동안의 글들은 그저 뮤즈가 날 통해 글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온전히 내 것이 아니었던 무언가가 그냥 나를 통해 흘러나갔다는 이야기다. 충분히 내가 이상해 보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토로해야겠다.


그런데 수상소식이라니. 나를 통과해 간 뮤즈가, 내 손을 타고 흘러나간 글이 수상되었다니. 왠지 차여버린 연인에게 온 한통의 전화 같았다. 그때처럼 열렬히 사랑할 수 없는데, 그때처럼 너와 나는 순수한 날것 그 자체로 서로를 투영할 수 없는데. 형형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것을 아는 연인처럼, 나는 무척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한 작가님의 말처럼, 주변의 소소한 것들에 집중하고, 귀 기울이다 보면 다시금 진솔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 '무엇'을 향한 열망과 사랑이 아닐지라도 나는 다시 나의 웅덩이를 채울 수 있을까? 

글을 쓰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다. 

그대들은 나와 같은 때가 없었는지. 혹여 나와 같은 정체기가 있었다면, 이런 고민을 나눌 영혼의 짝은 곁에 두고 있었는지.


오늘 밤도 쉽게 잠에 들지 못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솔직하고 바보 같은 심장과, 당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