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은 외로움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였다. 천장과 바닥과 벽을 타인과 공유하고 사는 존재들의 공명을 그리고 있는 이 격자구조의 소설은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명료한 구획선을 흩트려 놓는다" - 조대한-
아주 오랜만에 책장을 넘겼다. 그동안 읽었다 덮었던 책들이 족히 스무 권은 넘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책을 읽지 못하였다. 핑계다. 그저 핑계일 뿐이다.
수 달 동안 큰 계곡을 건너왔다. 큰 고개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나고 보니, 그곳이 계곡이고 고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난 항상 그래왔다. 모든 고개와 계곡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이 삭아내리는 지도 모르는 채 그곳을 지나왔다. 소중한 것들이 하찮게 여겨지고, 나르시시즘에 녹아내린다. 그렇게 고개와 언덕을 건너 평지로 돌아오면, 그제야 깨닫는다. 아, 굽은 길이었구나. 나는 또 내가 발화하는지도 모르고 불붙은 채로 그 길을 걸어왔구나. 무엇인가 쿵 하고 내려앉는다. 난 언제까지 이런 삶을 반복하며 살아야 할까.
이 책은, 층간소음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가지고 전개된다. 아랫집과 우리 집, 우리 집과 옆집, 옆집과 윗집이 피해자이며 가해자가 된다. 누가 누구를 먼저 찔렀다고 하기엔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이 처음과 끝을 찾을 수 없다. 돌고 돌아 모두가 미쳐버리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주인공들의 신경과민과 과대망상, 피해망상을 이해한다.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르는 소리. 나를 겨냥한 것 같은 소리. 화가 나서 머리가 폭발할 것 같은 소리들. 책에서 묘사한 모든 소리와 망상들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당신들도 한 번씩 경험해 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외면하고 있을 뿐.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복수심에 비소를 날리는, 옆집에 날리는 고무망치질을 즐기는 여러 상황들이 시국과 맞아떨어져 보였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조금 디프레스 된 것은 사실이다.
오랜만에 한자리에서 완독 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 주신 사서선생님께 감사하며.
# 형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며느리는 비명을 지르더니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누런 위액을 주방 바닥에 게워내는 며느리를 형님은 아무 동요도 없이 싸늘한 표정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며느리를 저렇게 만든 게 자기 자신인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무슨 얼어 죽을 산후풍, 시어머니 알레르기구만" 나는 생각을 혼잣말로 삭이지 못하고 그만 입으로 내뱉어버렸다. 그때 나를 노려본 것이 형님인지 며느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나도 그 둘이 끔찍하게 혐오스러웠다.
# 남편의 초점이 나간 달콤한 말보다 당신이나 아기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익명전문가의 말이 나에게는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저 노래가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 나는 울음소리가 크게 전달되도록 소파에 올라서서 성빈이를 달랬다. 거울에 비친 그 모습을 우연히 보고 경악을 했다. 눈물범벅이 된 새빨간 성빈이의 얼굴에 대비되는 밝게 웃는 얼굴의 나. 성빈이와 나를 해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위층 여자가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었다.
#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이렇게 되고 보니 엄마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외로움이 만들어낸 실체도 없는 소리가 엄마의 삶을 잡아먹었다. 나도 머지않아 그것에 먹힐 거다. 옆집 아줌마는 무슨 소리를 듣는 건지 엄마처럼 계속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 이제는 모든 것이 나와 상관없으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나는 다음 주부터 근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고개만 끄덕이고 앉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