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쓰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 글에게 마음을 넘기거나, 자기 객관화를 실현함으로써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글을 통해 어린 시절을 소화시켰고, 많은 부분 성장했다. 각각의 트라우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어 책장의 책처럼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그래서 책을 냈고, 글쓰기에 매료되었었다.
하지만 요즈음 드는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내가 쓴 글들이 모두 작품은 아닌 것이다. 무작정 흘러넘치는 글들을 엮은 게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글쎄, 내가 에세이를 출간하고, 어두운 새벽 같은 글들을 이 공간에 흘러넘치게 썼었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요즘 그렇다. 난 변덕쟁이라서 또 언제 그런 글들을 써 내려갈지도 모르겠지만.
사설이 길었던 이유는 바로 이 책도 실화에 근거한 고통의 과정을 아주 섬세히 다룬 책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이 문학적 가치가 있다 없다는 미미한 내가 판단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큰 흐름이나, 픽션보다 논픽션에 근거한 점에서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가깝지 않나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작가의 의도와 실제로 이 상황을 겪은 이의 슬픔과 두려움, 공포, 좌절은 많은 부분 이해하겠으나, 결국 책장을 덮고 얻는 것은 검은 연기 었다.
# 충격적인 사건에서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거기에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 어머니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순간 내 눈은 기차 화장실문의 무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 기괴한 무늬가 잊히지 않는다.
# 동생은 팔을 늘어뜨리고 나를 마주 안지 않았다. 이 무기력은 적대감이 아니라, 동생에게서 삶이 빠져나갔나는 뜻이었다. 어떤 움직임도, 어떤 감정의 가능성도 없었다.
# 어머니는 때때로 밝은 미래를 꾸며내거나 이민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등 무리해서 말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다른 곳으로 모험으로 아버지의 주의를 돌렸다. 그러면 그는 꿈꾸듯 미소 짓기 시작했다. 그때 지었던 아버지의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움 미소였다. 괴물이 아름답게 미소 짓지 말란 법은 없다.
# 우리를 둘러싼 삶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멋지고도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