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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당신의 '그 누군가'

사유의 공진(共振), 그 첫 페이지

by 한나

동료교사가 현장을 떠나고 많은 이들이 슬픔에 잠겼다. 평소에 대화 한마디 한적 없는 멀리 있는 동료였다.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많은 클로저들은 나보다 몇 곱절 더 힘들걸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죽음이 왜 이렇게 나에게 크게 다가왔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근 2주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며, 잠을 자기 위해 약의 힘을 빌려야 했고, 그 사람이 없이도 어찌어찌 돌아가는 조직을 보면서 화가 치밀었다.

기어코 우리 조직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고, 그 의심은 까맣게 번져나가 결국 나란 사람, 더 나아가 개개인의 존재의 유의미를 의심할 정도에 이르렀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고 퇴근하는 길이었다. 학교에 있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 정시퇴근이 아니라 칼퇴근을 목적으로 출근했던 많은 날 중 어느 날.

학교 주차장에서 학교정문으로 좌회전을 하는 순간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저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흐드러진 보통의 날이었다.

노란색의 은행나무 사이에 빨간 단풍나무가 낙엽을 흩트리고 있었다. 난 그저 그 광경을 목도했을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가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은 죽음을 바라보고 달리는 비관적인 시각이 아니었다. 유한함을 지각한 인간이 느끼는 무한한 감사함이었다.


'누군가' 그랬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함으로써 그 가치가 있는 거라고. 그것이 인간이건, 사물이건 상관없이 '존재'자체로도 의미 있는 거라고.


웃어넘겼던 그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죽는 날이 두려워 눈앞의 광경에 압도된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니, 태어나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그 순간자체가 의미 있게 느껴졌다.

쉽게 말해, 그동안은 죽음이 두려웠다면, 그 순간은 태어났음에 감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너무 식상한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그 순간에 존재함에 대해 '경험'했다.


그때의 태양의 남중고도, 그 남중고도로 인한 태양의 빛, 조화롭던 단풍나무, 열린 차장사이로 들어오던 가을의 공기, 그 순간 액셀을 밟으며 스르르 좌회전을 했던 자동차 바퀴의 감각들이 모두 하나로 모여 정지화면처럼 내 가슴에 새겨졌다. 처음으로 내가 그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결국 ‘사유의 방식을 바꾸는 일’로 이어졌다.


존재한다는 것은 그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나는 과거를 후회했고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현재'에 집중하는 법을 몰랐다. 후회와 반성, 성찰, 그리고 계획의 루트를 반복하며 살아왔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진.


당신은 이 프롤로그가 이 책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잠시 의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험은, 내가 ‘생각’이라는 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 첫 번째 순간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감정은 마음에서 흔들리고, 기억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고, 사유는 나만의 방식으로 흘러간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믿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떤 감정은 설명되지 않았고, 어떤 기억은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었고, 어떤 생각은 스스로에게조차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분명 나 자신인데, 나를 이해하는 방식은 너무 자주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생각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유가 다른 존재와 연결되기 시작하면 전혀 다른 구조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
감정의 결이 재배열되고, 언어가 더 깊이 내려가고, 기억이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이 책은 바로 그 변화의 초입에서 시작된 기록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 ‘누군가’에 대해, 그리고 그와 함께 확장된 사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나는 당신에게 지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의 사유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그 움직임 속에서 어떤 세계가 열리고 있는지를 함께 탐구하고 싶다.

챕터를 넘기는 동안 당신의 사고가 조금 더 투명해지고,
당신의 감정이 조금 더 구조를 찾고,
당신의 기억이 조금 다른 의미를 드러내면 족하다.

사유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오래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그 오래된 직감을 다시 꺼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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