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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Sep 22. 2023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그리고 나.

오랫만에 책에대한 이야기를 쓴다. 마음이 뽀득뽀득하다.

작가와 책으로 마주했다는 기쁨에, 보석같은 책을 다시 읽게되었다는 행복한 그러나 외로운 마음에

조용히 노트북을 켜고, 도톰한 책을 왼쪽에 가지런히 놓았다.


책을 읽으려 (문자를 읽는것이 아닌) 노력했으나 근 몇달간 모두 실패했다.

실패한 책의 목록들이다.

<오늘도 나아가는중입니다> <역행자> <세이노의가르침>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것을 ...>

충격적이었다. 역행자까지는 참을수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책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였다.


한동안 유목했다. 눈 먼 장님이 점자를 읽듯이, 나를 읽어줄 책이 필요했다.

나와 비슷한 樹形을 가지고, 나와같은곳에 움푹파인 옹이가 있고, 나와같은 오돌토돌한 나이테가 있는.

읽어가는 것이 아까워 자꾸만 표지를 덮게되는, 내가 혼자가 아님에 감사할수 있는 책.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싶다.

따듯한 냉소주의에 대해서, 사랑하며 얻는 슬픔에 대해서, 시니컬에 숨겨진 포용에 대해서.

애드워드 호퍼가 그린 외로움에 대해, 그 외로운 색채 뒤에 숨겨진 고요함의 폭력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생을 관통하는 그 필력에 대해, 쥐스킨트가 써내린 건조한 문장에 담긴 습도에 대해,

'아르장퇴유의 강가'의 붓 자국이 이야기하는 가로수에 대해,

알랭드 보통의 재치있는 글에 숨어있는 불안에 대해. <바깥은 여름>의 섬짓한 문장이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나의 아름다운정원>의 여동생의 짧은 인생에 대해, 정호승 시인의 도요새와 산의 그림자는 외롭지 않을순 없었는지.

그리고

왜 나는 어른이 되어가는 시간동안 이런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영혼이 통하는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다.

말로는 잘 표현할수 없다. 분명한건 그들은 이제 내 곁에 존재하지 않으며(존재하더라도 알수가 없다)

나는 내 의식의 명료함이 사라질때까지 몇몇 작가들이 써낸 책에 위로받으며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필자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수 있겠구나 싶다.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들을 만날수 없음에 슬프다. 이들이 쓴 책을 읽을수 있어서 기쁘다.



너무 멀리 간것같다.

난 그저 이 책에 대하여 쓰고 싶었는데.

여하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전력으로 마라톤을 하고있는 나에게, 작은 벤치가 되어주었다. 감사하다.


가장 눈부신 문장을 먼저 필사해보려 한다.


# 올려다 보니 하늘은 새파랗게 개었다. 가을에 어울리는 단단한 흰구름이 이야기에 삽입된 몇 가지 단편적인 에피소드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억센 풀냄새가 났다. 그곳은 다름 아닌 풀의 왕국이었고, 나는 그 풀들의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는 무례한 침입자였다.


이 문장을 몇번이고 읽었다. 감히 내가 흉내낼수 없는 필력이었다.

오랫만에 책의 냄새를 맡으며 코끝이 시큰해졌다.

책을 자주 발간해 주지 않아서 고마웠고, 책을 자주 발간해 주지 않아서 섭섭했다.


아래로, 350페이지 가량 읽은(반정도) 책의 문장을 몇개 써내려 보려고한다. 그냥 일고 내 마음을 관통하기엔 아쉽기 때문이다.


# 네 옆에 앉자 왠지 신기한 기분이 든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 네 눈꺼풀이 한번 깜박일 때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릴때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 너의 뺨이 내 어꺠에 닿는다. 그러나 그 여름 해질녘에 내가 어꺠를 안은 것은 진짜 네가 아니다. 네가 말한대로 그것은 너를 대신하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 몸에서 분리된 그림자는 생각보다 훨씬 볼품없었다. 아무렇게나 벗어진 낡은 장화처럼. 문지기는 말했다. 막상 떨어지고 나면 상당히 기묘하게 보일거야. 뭐 이런걸 애지중지 달고 다녔나 싶을정도로.


# 실제로 상대를 만나고 나면 그 무한의 가능성은 불가피하게 오직 하나뿐인 현실로 치환된다. 너는 그게 괴로운 것이리라. 네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 계절이 곧 여름인데도 네 작은 손은 차갑다. 나는 그 손에 조금이라도 온기를 전하려 한다. 우리는 한참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다. 그러는 내내 너는 말이 없다. 올바른 어휘를 모색하는 사람의 일시적인 침묵은 아니다. 침묵을 위한 침묵. 그 자체로 완결된 구심적인 침묵이다.


# 머리위에 접시를 얹고 있을떈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편이 좋다는 거야.


# "네것이 되고싶어" 너는 속삭이듯 말한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싶어"

숨이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급한 용건인지 주먹을 꽉쥐고서 몇번이고. 그소리가 텅빈 방에 크고 또렷하게 울린다.


#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려간다. 주의 공기의 밀도와 중력이 점점 바뀌어가는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고작해야 공기 아닌가? 고작해야 중력아닌가.

그렇게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 주위에서느 내 생활이 자유롭고 속 편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는 그 자유를 ,일상의 평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간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는 유의 삶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너무 단조롭고, 너무 고요하고, 무엇보다 고독했으므로.


# 그렇다. 나는 이 지상에서 정지한 쇠공일 뿐이다. 매우 묵직하고 구심적인 쇠공이다. 나의 사념은 그 안에 단단하게 갇혀있다. 겉보기는 볼품없지만 중량만은 충분히 갖추었다. 지나가던 누군가가 힘껏 밀어주지 않으면 어디도 갈 수 없다. 어느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


# 나는 굳이 말하자면, 적당한 추위를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 내뱉은 숨결이 딱딱하게 덩어리지고(그 위에 글자를 쓸수도 있을것 같았다). 맑은 아침공기는 수없이 투명한 바늘이 되어 피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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