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해가 밝으면서 '반년짜리 직장인'으로 진화했다. 백수의 시간을 각오하던 나에게 '반년짜리'는 의미가 없었거든. '직장인'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던 거지. 그러나 연말과 연초를 지배했던 그 '감지덕지'의 마음새는 현재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깨끗한 사무실 책상 위에서도 찾기가 어렵다. 이제 겨우 첫 출근으로부터 3주가 채워진 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지만 벌써 '무료함'에 지쳐가는 중이거든. 영화제 특성상 아직까지 일이 몰려오기 전의 '폭풍 전야'를 즐겨야 할 때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시작하면 지금의 순간이 그리울 것이다. '1일 1편'하는 '영화로운' 시간들을 그때는 누릴 수 없을 것이란 경고장들이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중이니까. 아, 소개가 늦었는데 현재 나의 직함은 '영화제 프로그램팀 해외영화담당 코디네이터'이다. 덕분에 영화제에 상영될 영화들을 미리 볼 수 있는 '베네핏'을 누리는 중이고. 그러니 한마디로 '등 따시고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뜻인 거지.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은 오랫동안 '일에 굶주려 온 하이에나'의 심정인 것을. 그러나 '일'보다 더 반가운 것도 있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기원에 가는 길에도, 야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무리 빨리 이 새벽을 맞아도 어김없이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들이 아직 꿈속을 헤맬 거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나보다 빠르다.
제목을 통해 벌써 눈치를 챈 사람도 여럿 있겠지만, 그렇다. 내가 '일'보다 더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것은 어느새 성큼 다가온 '월급의 날'이었다. 게다가 아직 받지도 않은 월급을 벌써부터 이리 쪼개고, 또 저리 쪼개며 스스로의 알뜰함에 감탄하기까지 한다. 결국에는 작별의 인사 하나 남기지도 않고 떠날 '무심한 월급'이 왜 이렇게 애틋한 건지. 미리 이별의 예행연습을 하면서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분명 손끝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거늘. 우리의 인연에는 언제쯤 '애프터'가 생기는 거죠?
그래도 이 반가운 마음을 홀로 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티지씨에게 '첫 월급'을 탄다고 미리 자랑을 했던 거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득한 비밀 무덤에 쌓일 이야기치고는 '경량급'이었달까. 물론 지금은 '중량급'으로 몸집을 불려 오랜만에 찾아온 <움큼한 사생활>의 중대한 에피소드가 되었다. '처음'이라는 단어의 깊이를 헤아리던 티지씨의 물음 덕분이었다. 단순히 '월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들떠있던 나에게 '어떻게', 또 '의미 있게' 쓰겠냐고 물었던 것이다. 덧붙여 그는 '부모님의 내복'을 사드렸다고 했던가.
뜨끔했다. 나의 계획에는 '부모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숫자들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건 오롯이 나뿐이었던 거지. 물론 설 연휴를 보내기 위해 본가로 내려가는 길, 두 손을 너무 가볍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 정도는 있었다. 그렇다고 그 마음이 '그 마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내가 '불효자'이기 때문이었을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수많은 처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2학년의 나이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경제적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월급'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 거지. 그래서 나에게 '첫 월급'은 어쩐지 '첫사랑'과 닮은 듯했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고 했던가. 그러나 움큼씨의 성별은 '여성'인 관계로 무덤까지 가지고 갈 '첫사랑'을 애초에 키우지 못했다. 만약 첫사랑이 '내 생애 최초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때 내가 걸친 '사랑'은 최고의 명품을 흉내 낸 '그럴듯한 짝퉁'이었을 뿐이니까. 굳이 표현하자면 '시랑'이나 '사링'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늘 오늘 하는 사랑이 '첫사랑'일 것만 같았다. 아니, '첫사랑'이길 바랐던 거지. 결국 '수많은 첫사랑'의 개성들만 남으면서, '첫사랑'이 고여야 마땅했던 자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 '첫 월급'이 '첫사랑'을 닮은 이유였다.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던 찬란한 순간은 아니었던 거지.
그런 점에서 티지씨의 '첫 월급'은 '첫키스' 같았다. '상대의 입에 자기 입을 맞추는 것'이라는 사전적 표현에 의해서라도 키스는 '육체적으로 그리고 물리적으로' 반드시 처음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부정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키스의 정의를 '얼마나 딥하게' 하느냐에 따라 '첫키스의 상대'는 유연할 수 있었다. 티지씨의 '첫 월급'처럼. 이를테면 대학시절의 알바는 풋내 나는 유치원 시절의 생일 뽀뽀 정도로, 졸업 후의 취업은 성인의 날 기념 키스 선물-물론 프렌치 키스 이상이다-로 분류할 수 있는 거지. 어느 쪽이든 키스는 언제나 사람을 흥분시키는 법이었고.
결국 월급은 어떤 형태이든 '사랑'이었다. 장거리 연애는 애틋하지만, 덕분에 단숨에 가까워진 거리는 종종 숨이 멎을 만큼의 설렘을 동반하니까.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지만, 스킨십으로 인해 곤두선 촉각은 오르가즘에 이를 때까지 황홀경에 젖어있을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 절정까지 나에게 남은 시간은 나흘. 이 기분에 취해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다만 당신의 '첫 월급'이 첫사랑이든, 첫키스이든 월급봉투에 추억 한 장쯤 남겨둘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월급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니까. ;)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취직해서 월급 받으면 그거 모으고. 뭐, 그런 거죠.
-같이 써도 돼요? 월급 받으면 같이 써도 되냐고요.
-그.. 그럼요.
-얼마나요?
-어.. 나는 조금만 쓰면 되니까, 나머지 다 쓰면 되죠?
얼마긴 얼마예요.
-약속해요 그럼. 대신 나도 많이 벌면 같이 쓸게요.
-진짜요?
-뭐 그렇게 좋아해요. 매력 없게.
-어떻게 해야 매력이 있을까요?
-나만 봐요. 나만. 나한테만 잘하고.
돈도 나하고만 나눠 쓰고. 이런 말도 나한테만 하고.
-우리 한 바퀴만 더 돌면 안 돼요?
진짜, 진짜 딱 한 바퀴만.
-어쩔 수 없지, 뭐. 한 바퀴예요.
-같이 가요. 내 옆에 딱 붙어서 가요.
이건 오프 더 레코드로 덧붙이는 말인데, 실은 '첫키스'를 잃어버렸다. 평소에도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편이라 친구들의 주의를 받는데, '첫키스'까지 잃어버렸다니. 이건 뭐 주의를 줄 수도 없겠다고들 한다. 5W와 1H 중 어느 것 하나도 채울 수가 없으니 함께 찾아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고. 어쩜 이렇게 인생의 '처음들'만 골라서 빼앗기며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억울함을 나누기 위해서라도 '빼앗긴 처음에도 사랑은 오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날이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그때까지 부디 그 덕에 얻은 '첫 단추를 잘 꿰는 법'만큼은 잊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