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a Dec 28. 2016

지금, 이곳은

비와 바람과 약간의 우울

얼마 전에 엄청난 비가 왔더랬다.

육지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땅으로 송곳처럼 내리 꽂히는 거센 빗줄기를 보고 있으면 

마치 세상의 끝을 마주한 기분마저 든다.


여긴, 그런 곳이다.


미처 생각지 못한 날씨와 사방으로 떨어지는 바람들. 

나부끼는 먼 산의 깃발을 쳐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 때도 있다.


치사한 감정에 빠지기에도 아주 좋은 시간이다.


끝없이 북적이는 사람과 시간을 피해 이곳에 왔지만,

결국 사람과 시간으로 말미암아

나는 또 가끔 우울하다. 


이 우울은

다만 북적이지 않게, 넉넉한 리듬으로 나를 쫓아오고 있다. 




지금, 이곳에 선 나의 마음에는 

비와 바람과 약간의 우울이 웅덩이처럼 고여 있다. 

 

분명 강을 하나 건넌 것 같은데, 여전히 돛단배 위에서 노를 저으며 씩씩대고 있다. 

나침반이 오른쪽 왼쪽, 수도 없이 흔들거린다.

어쩌면 나는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저 도시의 불안과 이기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쳐버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안과 이기에 휩싸인 도시가 되려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그렇게 실패한 인간이 되기 싫다는 보호본능으로. 


이 비와 바람을

억지로 말리려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유유자적 모래성이나 쌓으며 지낼 것이 아니라면

어차피, 겪어야 한다.


온 우주가 행복의 오라로 둘러싸인 것 같은, 신세계를 경험하리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오늘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조금은 센티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왠지 안쓰런 마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토닥토닥, 위로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斷想] 거짓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