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 에드워드 역 주변은 홍콩에서도 아주 오래된 지역입니다. 건물들만 보아도 그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사진 속 건물은 높이가 3~4층 정도로 낮고, 기둥이 있으며 보행자 통로 위로 건물이 돌출되어 확장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물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즉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지어진 것들입니다.
홍콩에서는 이런 건물을 영어로 ‘통라우(Tong Lau)’라고 부릅니다. 중국식 상가주택으로, 1층은 상업 공간으로 사용되고 2~3층은 주거 공간으로 쓰이던 구조입니다. 이것이 바로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홍콩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1950~60년대는 중국이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되던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개혁 과정에서 기근과 혼란이 이어졌고,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식량조차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본토를 떠나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생계의 가능성이 있던 곳,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으로 향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홍콩으로 올 수 있었을까요?
썸머의 할아버지도 바로 그 시기에 홍콩으로 건너오신 분입니다. 당시 국경을 넘는 방법은 사실상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돈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부패가 만연했기 때문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배를 타고 국경을 넘어 홍콩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반드시 건너야 했던 것이 바로 심천강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다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썸머의 할아버지처럼 직접 강을 헤엄쳐 건너는 것이었죠. 할아버지는 약 한 시간 반 동안 심천강을 헤엄쳐 홍콩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날씨는 매우 더웠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익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극적으로 살아남아 홍콩에 도착했고, 이후 건설 노동자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셨습니다.
대나무 비계는 오랫동안 홍콩 건설 현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기능적인 구조물이면서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풍경처럼 보일 만큼 독특하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홍콩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몇 년 안에 대나무 비계는 다른 공법으로 대체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썸머의 할아버지도 바로 이런 현장에서 일하며 홍콩에서의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한편, 썸머의 할머니는 스스로 홍콩에 오기를 선택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이 너무 가난해 ‘팔려 오다시피’ 홍콩에 오게 되셨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 사회에는 강한 남아선호 사상이 있었고, 여성은 가족에게 부담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할머니는 홍콩으로 보내져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고, 몇 년간의 노동 끝에 그 집을 탈출해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홍콩에서 살아남으셨습니다.
썸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왜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걸까요? 제 조부모님의 이야기를 알면, 오늘날 홍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홍콩은 처음부터 ‘부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모여든 도시였죠. 거의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들은 여전히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오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홍콩의 인구는 약 50만 명에 불과했지만, 중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발생한 정치·사회적 사건들로 인해 불과 10년 만에 200만 명 이상이 유입되었습니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인구 폭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영국 식민 정부는 무엇을 했을까요?
초기에는 사실상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53년, 라이언록 산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처음으로 적극적인 개입을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공공주택 건설이었고, 두 번째는 민간 개발업자들이 엘리베이터 없는 더 크고, 더 높은 건물을 짓도록 허용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이 거리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면 6~8층 높이의 건물들이 보이는데, 이것이 통라우의 2세대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홍콩에서 이런 집 한 채를 마련하려면 과연 얼마가 필요할까요?
현재 부동산 매물 중에는 지은 지 14년 된 건물로, 방 2개와 거실 1개로 구성된 집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이며, 주거 면적은 약 9평 정도입니다. 이 집의 매매가는 약 7억 원에 달합니다.
그렇다면 월세는 어떨까요? 가구가 포함된 집을 기준으로 보면, 면적은 약 6평으로 상당히 협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세는 무려 190만 원 수준입니다. 홍콩의 평균 월급이 약 300만~380만 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월급의 절반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해야 하는 셈입니다. 여기에 수도세와 전기세까지 별도로 부담해야 하니, 현실적으로 매우 버거운 구조입니다.
부동산 주인들도 이 현실을 알고 있습니다. 홍콩 사람들이 더 이상 ‘넓은 집’의 월세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요. 예를 들어, 원래 40㎡(약 12평) 짜리 집의 월세가 15,000 홍콩달러(약 285만 원)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부분의 홍콩 직장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그래서 집주인은 이 집을 세 개로 쪼갭니다. 각각 약 10㎡ 남짓한 공간으로 나누고, 한 유닛당 월세를 6,000 홍콩달러씩 받습니다. 결과적으로 집주인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게 됩니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15,000달러를 한 번에 내는 대신 6,000달러만 부담하면 되니, 그나마 ‘선택 가능한’ 옵션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홍콩의 분할 유닛입니다. 이제는 홍콩에서 매우 흔한 주거 형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와 함께 살고 싶지 않은 1인 가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분할 유닛조차 선택지가 되지 않는 경우, 다음 단계는 바로 케이지 하우스(cage house)입니다. 하나의 방을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하며, 보통 4~6개의 철제 케이지가 한 공간에 놓여 있습니다. 이 케이지는 이동이 가능하며, 사실상 사물함이자 개인 공간의 전부입니다. 개인 공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소지품을 이 안에 넣고 외출 시에는 반드시 잠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케이지’ 하나의 월세는 얼마일까요? 약 1,800 홍콩달러, 한화로 약 35만 원입니다. 이것이 홍콩의 실제 주거 현실입니다.
홍콩의 인구는 700만 명 이상이며, 그중 약 4분의 1은 제대로 된 주거 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합니다. 즉,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썸머는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홍콩 정부의 예산 구조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2023~2024년 기준, 15년 무상교육과 공공의료 등 복지 지출로 약 7,610억 홍콩달러를 지출한 반면, 수입은 약 6,420억 홍콩달러에 그쳤습니다. 수입 구조를 살펴보면, 정부가 홍콩의 토지를 매각해 얻는 수익이 약 12%, 주택 구매 시 부과되는 세금이 12%, 토지·부동산 개발업자가 납부하는 이익세가 26%를 차지합니다. 즉, 홍콩 정부 재정의 상당 부분은 토지 개발과 부동산 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택 공급을 늘리거나 토지 가격을 낮추는 정책을 강하게 추진할 유인이 크지 않습니다. 공공주택이 늘어나면 토지 가격과 부동산 가치가 하락하고, 이는 곧 개발업자의 수익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부와 부유층에게는 현 상황을 바꿀 강력한 인센티브가 없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일반 시민에게 전가되는 구조입니다. 썸머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 홍콩의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홍콩에서 26년 넘게 살아왔습니다. 가족은 다섯 명이었고, 과거에는 약 9평 남짓한 공공주택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방 하나와 거실 하나를 가족 모두가 공유했죠. 부모님, 언니, 저, 그리고 동생까지 다섯 명이 사실상 한 공간에서 생활했습니다. 부모님은 약 13년 전에 공공주택을 신청하셨고, 저희 가족이 실제로 배정받기까지는 약 1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홍콩에서 공공주택을 얻는다는 것은, 긴 시간과 큰 인내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제가 홍콩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할 당시 한 달 급여는 약 15,000 홍콩달러였습니다. 하루 두 끼를 밖에서 사 먹으면 평균 1,800~2,400 홍콩달러가 식비로 나갔습니다. 집에서 먹는 경우를 포함해도 월 생활비는 약 3,000 홍콩달러 정도였고, 여기에 교통비와 기타 생활비를 더하면 거의 남는 돈이 없었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을 부양해야 했고,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저축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어릴 적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에는 가야 한다고요. 그래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대학에 진학해 학위도 취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홍콩에서 마케팅 오피서로 일하며 한 달에 15,000달러를 벌고 있습니다.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급여죠. 그렇다면 ‘더 나은 삶’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이 사회는 평생 노력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저는 홍콩에서 제대로 된 집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과연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느끼는 이 도시의 진짜 어두운 면은,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도 괜찮은 집 하나 구할 수 없는 현실. 이 상황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고, 이 문제를 바꿀 힘을 가진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주라는 선택지까지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주 역시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쌓아온 삶과 감정, 현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유는, 우리가 직면한 이 문제와 이 도시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머무는 단 하루 동안이라도, 거리에서 마주치는 노동자, 경비원,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이런 현실 속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간 동안 저와 함께하며 홍콩의 이면과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도시는 여러 모양의 삶을 품고 있지만, 모든 삶이 같은 크기의 공간을 갖지는 못합니다. 전달되지 않는 목소리를 전파하기 위해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썸머를 보며, 홍콩이라는 도시는 화려함 뒤편에서 여전히 많은 삶을 조용히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