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거번먼트 힐(Government Hill)입니다. 과거 영국 식민지 시절 행정 중심지였던 곳이죠.
노란색 건물은 세인트 존스 대성당(St. John’s Cathedral)으로, 170년이 넘은 건물입니다. 동아시아 최초의 성공회 교회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선교사 건물(French Missionary Building)도 있습니다. 1842년 영국에 의해 지어졌고, 이후 프랑스가 매입해 선교 본부로 사용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홍콩 정부가 다시 매입해 관공서로 사용했고, 현재는 법률 관련 기관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홍콩의 여름은 매우 덥고 습합니다. 영국인들은 이 기후에 익숙하지 않았죠. 그래서 당시 영국 총독은 빅토리아 피크(The Peak)에 살면 도심보다 기온이 약 7도 정도 낮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 총독 관저를 지었습니다.
문제는 출퇴근이었죠. 그래서 총독을 위한 전용 피크 트램이 만들어졌습니다. 매일 아침 트램을 타고 센트럴로 출근하고, 퇴근 후 다시 피크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홍콩 최초의 ‘전용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영국은 왜 홍콩을 원했을까요?
정답은 무역입니다. 그리고 무역의 끝은 결국 돈이죠.
1700년대 후반, 중국과 영국은 비단, 차, 도자기, 그리고 아편을 거래했습니다. 당시 중국은 광저우만 외국과의 유일한 무역항으로 허용했지만, 영국은 더 많은 곳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거점을 찾다가 깊은 항구, 천연 요새, 중국과의 근접성을 가진 홍콩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은 아편 무역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중국은 아편을 사고 은을 지불했고, 영국은 그 은으로 중국의 차와 비단을 구매했습니다. 하지만 아편 중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번지자 청나라 정부는 아편을 몰수해 석회와 소금물에 섞어 바다에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긴장이 고조되며 제1차 아편전쟁이 발생합니다. 1842년, 중국은 패배했고 그 결과로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고 5개 항구를 추가로 개방했습니다.
하지만 갈등은 끝나지 않았고,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도 중국이 패배하면서 구룡반도가 영국에 넘어갑니다. 19세기말, 프랑스·러시아·독일·일본 등 열강이 중국에 영향력을 확대했고, 혼란 속에서 영국은 1898년 신계 지역을 99년 임대하는 데 성공합니다. 1997년 홍콩 반환의 해까지요.
윙맨의 조부모님들은 중국 선전 인근에서 태어나 1947년 홍콩으로 왔습니다. 일본 점령(1941~1945)이 끝난 직후였고, 중국은 국공내전과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홍콩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곳이었죠.
그녀의 부모님은 1940~5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전후 홍콩은 매우 가난했고, 어머니는 방과 후 플라스틱 꽃을 만들었고 아버지는 학생 시절부터 노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1950~70년대, 중국에서 온 난민들이 기술과 자본을 가져오며 홍콩은 제조업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의류, 플라스틱, 전자제품, 시계 산업이 발전했고, MTR, 해저터널, 공공주택, 공항 등 인프라가 구축됩니다. 1980~90년대 이후 홍콩은 금융 중심지로 변모하며 중국으로 향하는 관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99년 임대 종료가 다가오자, 1980년대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가 중국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결과는 1984년 중영 공동선언, 그리고 1997년 반환이었습니다.
1989년 중국에서 일어난 천안문 사건은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키웠습니다. 1989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정치 개혁, 표현의 자유, 부패 척결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중국 정부가 군대를 동원해 무력 진압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중국 정부가 체제 안정과 통제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 사건으로, 홍콩 사람들에게는 “홍콩은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곳인가, 안전한 곳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윙맨의 가족은 1995년 캐나다로 갔습니다. 이민자로서 삶은 힘들었대요. 아버지는 홍콩에 남아 돈을 벌어야 하셨기 때문에 가족을 일 년에 1-2번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홍콩에서 교사였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와서 두 자녀를 돌보셨대요.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면서요.
그러던 1997년, 홍콩은 반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어요. 홍콩과 중국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홍콩에서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나요? 광둥어입니다. 반면 중국 본토에서는 만다린을 사용하죠. 홍콩은 홍콩달러를 쓰고, 중국은 위안을 사용합니다. 홍콩은 자본주의와 보통법(Common Law)을 사용하고, 중국은 사회주의와 대륙법 체계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었을까요? 당시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이 ‘일국양제(一國兩制, One Country, Two Systems)’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중국과 달리 홍콩은 2047년까지 50년 동안 자본주의와 보통법 체계를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홍콩에는 특별한 신분증이 있습니다. 홍콩 주민이 중국에 입국할 때 사용하는 ‘홍콩·마카오 주민 중국 출입증’입니다. 홍콩 사람이 중국에 갈 때는 비자가 필요 없고, 이 카드만 있으면 체류 기간 제한 없이 머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중국 본토 사람이 홍콩에 오려면 비자가 필요합니다. 또한 홍콩은 자체 여권을 가지고 있고, 중국도 별도의 여권을 사용합니다. 중국 본토 사람이 홍콩에 올 경우 체류 기간은 최대 7일로 매우 짧습니다. 중국 인구는 약 14억 명이고, 홍콩은 지도에서 보면 아주 작은 도시입니다. 만약 중국 인구의 1%만 홍콩에 와도 홍콩은 감당할 수 없게 되겠죠.
또 다른 예는 세금 제도입니다. 홍콩은 천연자원이 없기 때문에 투자자를 유치하고 기업이 홍콩에 진출하도록 낮은 세율과 단순한 세금 제도를 운영합니다. 홍콩의 개인 소득세 최고 세율은 17%, 법인세는 16.5%이며, 자본이득세는 없습니다. 반면 중국의 세금 제도는 매우 복잡합니다. 개인 소득세 최고 세율은 45%, 법인세는 25%입니다. 또한 부가가치세(GST와 유사한 개념), 물건을 사고팔 때의 세금, 술이나 담배, 사치품에 부과되는 소비세 등 다양한 세금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국양제(One Country, Two Systems)는 실제로 작동할까요?
2019년 사회 운동 이후 중국이 홍콩에 개입하고 홍콩 국가보안법을 시행했습니다. 이것이 ‘일국양제’는 사실상 끝났다는 논란을 불러왔어요.
실제로 홍콩의 최고 책임자는 중국에 보고합니다. 홍콩에도 선거가 있지만, 후보 5명은 이미 중국이 선택한 사람들이라 실제로 자유로운 선거는 아니라고 해요.
홍콩 사람들은 다시 한번 미래를 걱정하게 되었고 많은 중산층과 아이 있는 사람들이 이미 홍콩을 떠났습니다. 2006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던 윙맨의 동생도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대요.
많은 다국적 기업도 홍콩을 떠났습니다. 특히 금융권 기업은 싱가포르로 이동했습니다. 법률 시스템이 기업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윙맨은 홍콩의 미래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군대가 있는 대만과 달리 홍콩은 군대가 없습니다. 따라서 독립 국가가 될 수 없고, 항상 중간자 역할에 갇혀있다고요.
다시 거번먼트 힐로 돌아오면, 이 모든 이야기가 한 곳에 겹쳐 보입니다. 식민지의 흔적, 무역의 논리, 제도의 실험, 그리고 사람들의 삶.
건물은 그대로 서 있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던 시스템과 믿음은 바뀌어 왔습니다. 홍콩은 늘 누군가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였고, 그 선택의 결과를 살아내야 했던 건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홍콩의 역사는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쓰이고 있는,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