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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전쟁 | 홍콩

by Harper

풍수는 환경의 조화를 통해 운과 재물,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는 중국의 전통 사상입니다. ‘풍수(風水)’는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풍(Feng)’은 바람을, ‘수(Shui)’는 물을 뜻합니다.



사진 정면에 보이는 은색 건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네, HSBC입니다.


HSBC는 Hong Kong Shanghai Banking Corporation의 약자로, 영국계 은행입니다. 이 건물은 뒤로는 산을 두고, 앞에는 빅토리아 하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풍수에서 산은 ‘안정’을, 물은 ‘재물’을 의미하죠. 게다가 이곳은 홍콩의 두 가지 큰 기운이 만나는 교차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매우 좋은 풍수를 지닌 자리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건물을 세우면 홍콩의 맥이 끊겨 도시가 쇠퇴할 것이라는 풍수사의 의견도 있었다고 해요. 이에 건축을 맡은 노만 포스터는 기운의 흐름을 막지 않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합니다. 건물을 아예 들어 올린 것이죠. 그래서 1층이 기둥 없이 탁 트여 있습니다.



건물을 떠받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이 바로 ‘사장교 구조’입니다. 양쪽에 있는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 메인 구조체 역할을 하고, 그 사이를 케이블 형태의 구조물이 연결해 건물을 공중에 띄운 것입니다. 덕분에 바다에서 들어오는 기운, 즉 ‘돈의 흐름’이 막힘없이 은행 안으로 들어온다고 여겨집니다.



HSBC 양옆에는 마치 ‘두 팔’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있습니다. 왼쪽의 삼각형 모양의 기하학적인 건물이 중국은행(Bank of China), 오른쪽의 분홍색 건물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Standard Chartered Bank)입니다. 이 두 건물이 바다에서 들어오는 재물을 끌어와 HSBC로 모아주는 팔 역할을 한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건물들 사이에는 흥미로운 풍수 전쟁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중국은행 건물이 HSBC보다 더 높았습니다. 하지만 1985년, HSBC가 재건축을 통해 현재의 건물을 세우면서 중국은행보다 더 높은 건물이 됩니다. ‘높이’는 곧 권력을 상징합니다.


이에 중국은행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새로운 건물을 세웁니다. 바로 저기 보이는 삼각형 모양의 건물입니다. 중국은행은 이 건물이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국 문화에서 대나무는 성장과 강인함의 상징이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보면 대나무보다는 칼날이나 칼처럼 보이지 않나요? 마치 HSBC와 옛 총독 관저를 향해 겨누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풍수적으로는 매우 좋지 않은 형태로 해석됩니다. 실제로 이 건물이 들어선 이후, 주변 건물에 있던 회사들이 잇따라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에 대한 HSBC의 대응도 흥미롭습니다. 건물 옥상을 자세히 보면 ‘대포’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있습니다. HSBC는 옥상에 두 개의 대포를 설치해 중국은행 방향을 향하도록 했습니다. 왼쪽을 보시면 중국은행을 겨냥한 대포가 보일 겁니다. 이른바 ‘풍수 전쟁’은 이렇게 점점 격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국의 중국은행과 영국의 HSBC 은행 간의 풍수의 충돌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홍콩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인 리카싱(Li Ka-shing)입니다. 그는 한때 파나마 운하 관련 사업도 소유했고, 홍콩 최대 부동산 개발사 중 하나인 청쿵 그룹을 이끈 인물입니다.


리카싱은 HSBC와 중국은행 사이에 자신의 사무실 건물인 청쿵센터(Cheung Kong Center)를 세웁니다. 저기 보이는 검은색 건물이죠. 이 건물은 정사각형의 요새처럼 보이며, 창문은 45도 각도로 기울어져 방패처럼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칼날과 대포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기운을 막아준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반사 유리를 사용해 액운을 되돌려 보낸다는 의미도 담았다고 합니다.


이제 HSBC 건물 입구로 가볼까요? 이곳에는 매우 유명한 두 마리의 사자상이 있습니다.



이 사자들의 이름은 스티븐(Stephen)과 스티드(Stitt)입니다. 스티븐은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모습으로 힘과 보호를 상징하고, 스티드는 입을 다문 채 차분히 앉아 있어 안정과 보안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들은 실제로 HSBC 역사 속에 존재했던 고위 임원, A.G. Stephen과 G.H. Stitt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해요.


이 사자상은 1935년에 제작되어 본사 입구를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1941년 일본이 홍콩을 침략해 3년 8개월간 점령했을 당시, 일본군은 이 사자상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무기로 녹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행히도 미국 선원들이 오사카의 한 조선소에서 이 사자상들을 발견했고, 결국 홍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HSBC가 사자상을 복원했지만, 몸에 남아 있는 작은 구멍들은 일본 점령기 당시 파편 피해의 흔적입니다.


중국 문화에서 한 쌍의 사자는 건물을 지키는 수호자이며, 사자의 발이나 몸을 만지면 행운과 재물이 들어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사자의 발과 코를 쓰다듬으며 재운과 번영을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자 중, 홍콩 지폐에 등장하는 사자는 누구일까요? 네, 바로 입을 다문 사자, 스티드입니다. 왜 스티븐이 아니라 스티드일까요? 현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스티븐은 입을 벌려 돈이 들어오게 하고, 스티드는 입을 다물어 그 돈을 지킨다.”


지폐에는 재물을 불러들이는 힘보다, 안정과 신뢰를 상징하는 존재가 더 어울렸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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