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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per Apr 02. 2024

칠레 셰프와 시장 구경 | 칠레 산티아고

왼쪽 종아리에는 배불뚝이 개구리 문신이 있고, 오른쪽은 외계인을 새긴 것을 보면 디에고는 분명히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에 은색 링귀걸이로 스타일을 완성한 그는 사실 셰프다.


디에고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태어나서 대학교까지 나온 후에 영어를 배우고 싶어서 호주로 떠났다. 시드니 맨리 비치 근처에 살면서 영어도 배우고, 서핑도 하던 1년 동안 너무 즐거웠다고 했다. 공부를 마치고 난 후에 그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5년 동안 셰프로 일했다. 호주에서 2년, 네덜란드에서 4년, 총 6년을 해외에서 보내고 난 뒤 작년에 칠레로 돌아왔다. 가족과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다. 나중에 디에고는 가족들과 함께 칠레 요리 전문 레스토랑을 차리고 싶다고 했다.



Vega Central de Santiago는 디에고가 일주일에 한 번은 장을 보는 시장이다. 엄청난 규모의 시장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야채와 과일의 신선도이다. 색과 향만 봐도 얼마나 싱싱한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디에고는 칠레 전통 간식 소빠이삐야 (Sopaipilla)를 추천해 주었다.


"호박이 주재료고, 밀가루랑 올리브 오일, 그리고 소금. 그게 다야. 반죽을 깊은 기름에 튀긴 다음에 토마토, 양파, 칠리를 섞어 만든 소스랑 같이 먹으면 돼."


소빠이삐야 (Sopaipilla)


소빠이삐야는 겨울 간식이라고 했다. 4월에 먹는 소빠이삐야도 맛있었다.


점심으로는 파스텔 데 초클로 (Pastel de choclo)를 추천해 주었다. 번역하면 옥수수 케이크라는 의미인데, 옥수수를 갈아서 페이스트로 만들고, 다진 쇠고기, 닭고기, 삶은 계란 조각과 양파, 파프리카 등 야채를 섞는다. 디에고가 레스토랑을 열면 소빠이삐야랑 파스텔 데 초클로를 먹으러 가고 싶다.


파스텔 데 초클로 (Pastel de choclo)




칠레는 양극화가 심한 나라다. 산티아고 동쪽에는 중심업무지구, 쇼핑센터,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이 즐비하고 칠레의 권력가들이 모여 산다. 반면, 도시 서쪽에는 집, 교육, 일자리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각종 범죄, 마약 거래가 주로 일어나는 공간이라고 한다. 칠레의 양극화와 정치 갈등은 하루 이틀 사이의 일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1970년에 시작된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는 세계 최초로 민주 선거로 뽑힌 사회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곧바로 사회 제도 개혁에 착수하는데, 칠레의 부를 독점하는 소수의 자본가들과 칠레 경제를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을 겨냥한 것이었다. 구리 광산과 은행과 같은 대규모 산업들을 국유화했고, 모든 어린이들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를 지급했으며, 의료 및 교육 복지 정책을 대폭 늘렸다. 하지만, 사회주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미국 등 자본주의 강대국과 다국적 대기업들이 칠레에 대한 투자를 끊기 시작하면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간다. GDP가 줄고 정부 예산 적자가 치솟았으며 외환 보유고는 떨어졌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서 칠레 경제는 공황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3년 아옌데가 다시 당선될 것이 확실해지자, 칠레 군부가 쿠데타를 기획한다. 아우구스트 피노체트가 이를 주도했고, 미국 닉슨 대통령과 CIA가 비밀리에 이를 지원했다. 이 내용은 피노체트 쿠데타에 대한 문서가 기밀 해제되면서 대중에 공개되었다.


1973년 9월 11일 새벽,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게 전화가 한통 걸려온다. 쿠데타가 시작되었으며, 발파라이소에서 출발한 반란군의 목적지는 산티아고라는 보고였다. 대통령궁 방어를 위한 병력 배치가 시작됐다. 오전 9시경, 첫 총성이 울렸다. 대통령궁을 겨냥한 반란군의 발포였다. 이어 대통령궁으로 또 전화가 걸려왔다. 군부의 전화였다. 당장 사임을 하면 가족과 함께 안전한 망명을 보장할 테니, 투항하라는 제안이었다. 아옌데는 바로 거절했다.


대통령 궁


당시 거의 모든 라디오 방송국은 군이 점령한 상태였다. 마가야네스 라디오 단 한 군데만 빼고. 그는 그 라디오 스테이션을 통해 마지막 연설을 한다.


"여러분, 이번이 아마 여러분에게 말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겁니다. 공군이 이미 라디오 포르탈레스와 라디오 코르포라시온의 송신탑을 폭격했습니다. 자신의 맹세를 배신한 군부에게 단죄가 뒤따르기를 바랍니다. 칠레의 군부, 해군 참모총장 메리노 제독, 그리고 비열한 멘도자 장군.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정부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쿠데타군에 가담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 앞에서 제가 여러분께 드릴 말씀은 오직 하나입니다. 저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저는 민중의 충정에 대해 제 목숨으로 보답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수많은 칠레 인민들의 존엄한 의식 위에 뿌린 씨앗은 결코 파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고 우리를 억누를 수 있지만, 사회적 변혁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범죄 행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여러분이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보내주신 변치 않는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곧 마가야네스 라디오도 침묵하게 될 것이고, 제 목소리는 여러분께 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민중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절대 희생되어서는 안 됩니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 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어 나갈 것입니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후 아옌데는 군사 쿠데타에 대항하여 투쟁하다가 대통령 궁에서 자결한다. 이를 둘러싸고 쿠데타군의 처형 의혹이 있었으나,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대통령 궁 주변에는 역대 대통령의 동상들이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동상도 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동상만이 대통령이 아닌 사람을 기리고 있다. 아래 동상이다.


디에고 포르탈레스 동상


이 동상은 디에고 포르탈레스를 기리고 있다. 그는 칠레의 옛 총리로, 식민지 독립 이후에 첫 헌법을 공포하여 입헌 정치를 확립한 중요한 사람이다. 이 동상은 1860년에 세워졌다. 1973년 쿠데타가 벌어지기 113년 전이다. 즉, 군부 쿠데타가 벌어지고 총성이 오갈 때에도 이 자리에 있었다. 동상 뒤쪽 건물에서는 동상 앞 대통령궁 쪽으로 계속 총을 쐈고, 대통령궁에서도 대응 사격을 했다. 그날 수천 발의 총성이 울렸다고 하는데, 총알 하나가 이 동상에 박혔다.



바로 눈 밑이다. 신기한 것은, 디에고 포르탈레스가 전사할 때 총을 맞은 곳이 정확히 그곳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정권을 탈취한 피노체트와 장성들은 독재를 시작한다. 17년 간의 독재 기간 동안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정당 인사들 뿐만 아니라, 이념 구분 없이 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온갖 핍박과 고문을 당했다. 가혹 행위를 당한 사람이 10만 여 명이나 된다고 알려져 있다. 1980년, 군부는 헌법을 제정했다. 신자유주의 사상이 강하게 녹아있고, 수자원 같은 필수 자원도 사유화가 가능했다. 이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칠레 사람들은 이 17년을 칠레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라고 표현한다. 1989년, 상황이 너무 악화되자 민주화 운동이 벌어졌고, 정권 유지냐 교체냐를 두고 투표가 이루어진다. 55%가 독재 정권에 반대표를 던졌고, 나머지 45%는 독재 정권 유지에 표를 던졌다. 결국 독재 정권은 패배를 선언했지만, 표가 거의 반반씩 갈린 것으로 보면 빈부 양극화와 분열이 얼마나 심한지를 알 수 있다.


2019년 10월, 빈부 격차와 사회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지하철 요금 인상이 도화선이 되었다. 인상된 금액은 30페소 (50원)로 큰 금액은 아니었는데, 이제 모든 악습은 끊어야 한다는 인식을 만들며 시민 100만 명을 바케다노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칠레 역사상 가장 큰 시위였다.


바케다노 광장 (Plaza Baquedano)


다음 날, 대통령은 지하철 요금 인상을 철회했다. 대통령은 시위를 멈추려는 생각으로 철회를 했는데, 시민들은 시위를 하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위는 더 강해졌고, 곧 칠레 사회를 재설계하자는 헌법 개정 요구로 이어졌다. 독재 시대에 만들어진 낡은 유물인 피노체트 헌법을 뒤로하고, 새 헌법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78%의 칠레 시민들이 헌법 개정 찬성에 투표를 했다. 다음 단계는 새 헌법을 만들 헌법위원을 선임하는 것이었다. 칠레 국민들은 155명을 선임했다. 정치인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었다. 일정 수 이상의 사람들에게 서명을 받으면 출마를 할 수가 있어서, 바케다노 광장에서 피카추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스쿨버스 기사 아주머니가 당선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1년 후 개정안이 공개되었고, 새 헌법 채택 여부를 묻는 국민 총투표가 진행되었다. 62%가 새로운 조항들에 반대표를 던졌다. 칠레 로컬에 따르면 가짜 뉴스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새 헌법이 발효가 되면 '이민자들을 집에 들이고 청구서 비용을 처리해줘야 한다', '원주민들은 원주민 관습에 맞게 살게 된다'하는 말도 안 되는 뉴스들이었다. 하지만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게 진짜라고 믿었고 반대표를 던졌다고 한다.


개헌안 부결 이후, 새로운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새로운 개정안이 발표되었다. 2023년 12월 새 헌법 제정 찬반 국민투표 개표 결과는 찬성 44%, 반대 56%였다. 또다시 개헌안이 부결되었다. 낙태 완전 불법화가 큰 논란이 되었다고 한다. 두 번의 부결로 많은 칠레인들이 새 헌법 제정 절차에 대한 불신과 환멸감을 표시하고 있다.


더 나은 칠레를 위한 해결책이 곧 나오기를 기원하며, 응원을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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