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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per Apr 01. 2024

은인 | 칠레 깔라마

버스를 타고 볼리비아에서 칠레 국경을 넘어왔다. 출입국 심사를 할 때 한 칠레 가족을 만났다. 아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우유니로 여행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어제 나를 본 걸 기억해 주시고 인사를 건네주신 게 감사했다.


어머니는 볼리비아에서 산 예쁜 곱창 밴드를 하고 계셨다. “밴드가 너무 예뻐요!”라고 하니, 밴드를 풀어서 보여주셨다. 버스에서 진주 귀걸이 한쪽을 잃어버렸다고 한 쪽 귀를 내미는 모습이 소녀 같아서 귀걸이를 같이 찾자고 했다. 아버지는 늘 온화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말씀이 거의 없으시고 우리가 다 같이 사진을 찍을 때는 멀찍이 떨어져 계셨지만, 인사할 때는 손을 제일 세차게 흔들어주셨다. 아들은 따뜻한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서 그런지 선하고 친절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이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배낭과 크로스백을 같이 메고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게 야무지게 느껴졌다. 영어를 잘하는 아들 덕분에 우리는 다 같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우유니에서 찍은 사진도 같이 보고, 칠레 이야기도 하니 긴 대기 시간이 알차게 흘렀다.


“칠레에서 좋은 시간 보내기를 바라요.”라는 인사와 미소가 칠레의 햇살만큼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출발한 지 9시간 만에 칠레 깔라마에 도착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버스는 터미널이 아닌 곳에 우리를 내려줬다. 유심도 없고, 칠레 돈도 없고, 스페인어도 못하는데 얼른 비행기 타러 공항에 가야 하는 막막한 상태. 칠레 가족이 상황을 듣더니 주머니에 있던 돈으로 환전도 해주고 택시도 잡아주셨다. 은인이다.


은인이 환전해준 돈


공항 가는 길, 깔라마의 풍경은 아주 평화로웠다. 우유니에서 만난 한국인 분들은 깔라마는 위험하니까 돌아다니지 말고 터미널에서 바로 공항에 가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기사님은 나를 콕 찝어서 가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한껏 긴장해서 택시를 타고 주위를 돌아보는데, 골목들이 아름다웠다. 아는 것이 힘일까, 모르는 게 약일까. 그래도 모르는 곳을 여행할 때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다 보니 공항에 도착했다.


새벽 여섯 시부터 휴게소도 들르지 않고 달려온 탓에 배가 고팠지만 유심과 환전이 먼저였다. 작은 공항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니 환전소도 유심 파는 곳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인 가족에게 다시 한번 고마워지는 순간이다.


텅빈 깔라마 공항


와이파이도 되지 않는 깔라마 공항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오늘은 아무 곳도 둘러보지 못한 이동의 날이지만, 은인 덕분에 마음이 제일 풍성한 날이다. 볼리비아 라파즈에서 우유니로 올 때 타고 온 버스에 ’관광객이 되지 말고 여행자가 되세요.‘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나는 오늘 관광객이 아니라 여행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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