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 합격 소식을 듣고, 정신없던 와중에 내가 최후의 만찬으로 선택했던 바로 잔치국수였다. 이번만큼은 갈매기살도 샤브샤브도 잔치국수를 이기지는 못했다. 목요일 저녁에 합격 연락을 받고 금요일은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만 했다. 민증을 잃어버렸지만 딱히 쓸 일은 없어서 새로 만드는 걸 계속 미루고만 있었는데, 회사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을 떼 가려면 민증이 필요했다. 회사는 민증을 요구하지는 않았는데 민증이 꼭 있어야만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사진을 찍고-이전 사진은 당연히 거절당했다-동사무소에 가서 민증을 만들고 그곳에서 초본을 떼고, 신한은행에 가서 통장사본을 떼고, 농협에 가서 공인인증서를 발급받아야 했다. 집에 있는 동안 옷도 사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서 사람처럼 다니려면 새 옷과 신발도 사야 했다.
급하게 잡은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나니 11시였다. 배는 고팠지만 은행이 3시에 닫기 때문에 식당에 가서 밥을 먹기는 마음이 촉박했다. 그래서 사진관 근처에 있는 잔치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잔치 국숫집은 내가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게 Top 10안에 드는 최애 식당 중 하나다. 우리 동네에는 큰 시장 건물이 있는데 2층은 식당이 대부분이다. 여긴 유명한 맛집이라는 아빠 손에 이끌려 간 곳에서 궁극의 잔치국수를 먹었다면 믿을까? 입맛이 까다롭고 잔치국수라면 다 좋아하는 아빠가 '특히' 맛있는 집이라고 했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아빠의 까탈스러운 성격은 마음에 안 들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 가는 곳은 다 맛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처음 먹었을 때 나는 이제껏 먹은 잔치국수가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이걸 잔치국수라고 부르는 거구나! 이름 그대로 잔치에서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음식이었다. 잔치 때 이런 음식을 나눠먹으면 흥이 절로 오를 게 분명했다.
얼마 전까지는 뜨거운 국물 때문에 땀이 흐를 정도였는데 날이 선선해서 그러지도 않았다. 시원한 날씨에 속을 채우는 국물은 언제 먹어도 완벽했다. 텅 빈 내 안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시장의 인심을 대변하듯 국수 면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다. 해장하는 것도 아닌데 으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빈 잔이 뜨거운 물로 꽉 채워지는 기분이다. 가벼운 탓에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날아가는 잔이, 안이 든든해져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기분이다.
잔치국수만큼 한국적인 음식이 있을까? 잔치국수를 먹었던 상황은 너무 많아서 흩뿌려져 있다.
학교에서는 특식으로 잔치국수가 나왔었다. 그날은 잔반 없는 수요일이기도 했지만 체육대회였던 때가 더 선명하다. 1년에 한 번, 학교 다니는 3년 동안 딱 3번 있는 체육대회. 중학생 때는 이런저런 음식들이 섞여서 나왔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를 다녔던 3년간은 모두 잔치국수만 나왔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잔칫날이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먹거리라고 한다면 잔치국수다.
나름대로 좋은 전략이었다. 학교에서 모든 학년과 선생님들이 다 같이 놀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기에 특식이 필요했고, 반장들 사이의 센스를 겨루느라 햄버거나 아이스크림이 끝없이 밀려드는 날이었기에 모두의 호불이 적으면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음식 이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잔치국수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배가 부르지도 않아서 햄버거를 먹은 애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고 잔치국수를 싫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도 그날이면 두 배는 더 신나서 급식실로 달려갈 수 있었다.
이제는 멀어진 친구와 잔치국수를 먹은 적이 있었다. 먼 지역에서의 수학 관련 행사에 들렀다가 집에 오는 길에 이른 저녁으로 국수를 먹었다. 처음 가보는 식당이었지만 잔치국수라면 실패 할리 없다고 생각했고 낡은 간판과 식사시간이 아님에도 손님들이 들어차 있는 것을 보고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예상보다 훨씬 맛있었는데 재작년쯤에 없어졌다. 그 친구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본가가 그 국숫집 근처인 바람에 그 주위를 지날 때마다 그 친구 생각이 났다.
마산 할머니께서 국수를 자주 만들어주신다. 할머니는 손이 큰 편이라 양푼에 국수를 한 움큼씩 덜어주셨다. 똑같은 육수와 양념으로 만드는데도 '손맛'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엄마가 해준 국수보다 맛있다. 먹고 나면 배를 두드리고 싶어 진다.
다른 음식들은 하나의 기억이 뚜렷한 편인데 국수만은 유독 다른 기억들이 닫지 못한 상자처럼 튀어나온다. 그만큼 좋았던 순간들이 많았던 탓일까? 외로운 날이면 국수를 찾는다. 잊지 못할 기억들에 위로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