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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Feb 20. 2022

멸치와 고추장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똑같은

소박한 음식이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간장계란밥? 김에 싸 먹는 밥? 물에 만 밥과 김치? 방금 나열한 음식들 모두 나의 든든한 한 끼임에 틀림없지만 내가 가장 애정 하는 한 끼는 바로 멸치와 고추장이다.


준비물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멸치들과 고추장 한 숟가락, 그리고 밥 한 그릇과 밥을 말 물. 밥을 미리 퍼놓고, 나는 멸치를 딴다. 먹다가 부족하면 흐름이 깨질 수 있으니 예상보다는 4마리 정도 더 딴다. 머리를 떼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뗀다. 까만 내장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떼낸다. 그걸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면 살만 남은 마른 멸치들이 쌓인다. 멸치를 다 까면 밥에 물을 붓는다. 밥을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된다. 이 소박한 반찬으로 밥 두 공기는 거뜬하게 먹는다.




다른 집에서도 멸치에 고추장을 찍어먹는지, 마른 멸치를 먹기는 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저 어릴 적부터 내가 이걸 먹어왔다는 기억밖에 없다. 마른 멸치와 고추장이라면 언제든 오케이인 지금과는 달리 어릴 적에는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는 머리만 떼고 내장은 제거해주지 않은 채로 멸치를 줬기 때문이다. 내장은 좋아할 수 없을 정도로 썼다. 그래서 싫었다.



어느 날부터는 내장을 제거하면 고소한 맛이 난다는 걸 알아서 자주 먹게 됐다. 입맛이 없을 때, 생각나는 밥반찬이 없으면 멸치를 먹었다. 멸치는 이렇게 먹어도 맛있고 반찬으로 볶아먹어도 맛있고 아무튼 맛있다. 멸치랑 고추장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재수 시절이다. 분명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는데 이상하게 멸치만 생각이 난다.







제대로 교류하는 친구가 단 한 명뿐이었던 내 재수 시절은 만화가 없었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된 순정만화들뿐만 아니라 그전부터 좋아했던 스포츠 만화들. 내 유일한 즐거움도 일주일에 두 번 티비에서 방영해주는 만화였다.


토요일 12시면 티비 앞에 앉아서 멸치 머리를 땄다. 다 까고 나면 어째서인지 배가 고팠다. 그 시간만큼은 근심도, 걱정도 잊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 상황이 어떻든, 기분이 어떻든, 멸치랑 물에 만 밥을 먹으면 다 괜찮았다. 먹을 때마다 같은 맛이 났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것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수능 때도 싸가고 싶었지만 창피하다는 엄마의 만류로 그러지는 못했다.-먹는 건 난데 왜 엄마가 창피할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지금도 입맛이 없을 때면 냉장고에서 멸치와 고추장을 꺼내 든다. 남들이 보기엔 많이 빈곤하고 매력적이지 않은 식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보다 완벽한 식사는 없다. 언제나 일정한 맛을 가지고 있다. 변수가 적기 때문에 싫어하게 될 일이 없다. 특별한 추억도 없고 애틋한 이야기도 없지만 자꾸 찾게 된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식사다.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계속 좋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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