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었다고 실감하는 때는 상실과 변화를 경험할 때다. 맨 처음 상실을 경험했던 건 아무래도 고등학교 3학년 때다. 단순히 내 주위에 있는 게 사라지는 게 상실이 아니다. 추억하고 싶은 것을 더 이상 추억할 수 없어졌을 때, 상실이라고 부른다. 나에게는 학교 근처 골목의 M사의 햄버거 집이 그런 존재였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 맞은편에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창 시절의 처음과 끝에서 M사의 햄버거 집이 중간중간 섞여있다. 초등학생 때는 시험을 잘 치면 엄마 아빠가 반에 콜팝 쿠폰을 돌렸다. 고등학생 때는 체육대회 때마다 반장이 햄버거 세트를 돌렸다. M사의 음식은 혼자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다 같이 나눠먹는, 우리에게는 특식 같은 존재였다.
M사는 문방구 위층에 있었는데 하굣길에 들른 아이들 때문에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뤘다. M사는 몇 개 없는 계단이 꽤 가팔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인사하는 아저씨의 목소리와 작은 테이블 네 개가 우릴 반겼다. 모든 패스트푸드점이 그렇듯 매번 정신없고 바쁜 곳이었다. 여름에는 가게 입구 옆에서 슬러쉬도 팔았다. 콜라맛과 환타 맛. 한잔에 500원짜리 슬러쉬는 그 어떤 음료보다도 시원했다.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계절메뉴였다. 여름을 알리는 신호가, 어쩌면 M사의 슬러쉬였을지도 모르겠다.
M사의 양념감자
초등학교 3학년 때 양념감자를 처음 먹어보았다. 그때는 밋밋한 감자튀김만 있던 때였기 때문에 양념감자는 혁신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1800원이었다. 일주일에 용돈 1500원을 받아서 양념감자를 사 먹었다. 초등학교 3학년에게 1800원이 얼마나 큰돈이었던지, 당시에는 1000원만 있어도 문방구에서 뭐든지 마음껏 먹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은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제일 친했던 친구와 양념감자를 먹었다. 처음에 양념감자를 받아 들고 얼마나 놀랐던지. 새까만 점이 콕콕 찍힌 감자가 어딘가 잘못된 줄 알았다. 먹으면 배탈 나는 게 아닌가, 상한 게 아닌가. 친구랑 열띤 논쟁을 벌였다. 우리는 중국산 감자라 그런 거라는 이상한 결론을 내렸다. 맛은 무엇보다 맛있었다.
집에 가서 엄마한테 오늘 먹은 감자튀김이 이상했다는 얘기를 했다. 엄마는 원래 그런 거라고, 상한 거나 이상한 게 아니라고 제대로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돈이 모일 때마다 감자튀김을 사 먹었다. 물론 엄마한테는 비밀로 했다.
따끈따끈한 감자튀김을 건네받으면 손바닥에서부터 따뜻함이 퍼져나간다. 이쑤시개로 감자를 콕콕 찍어서 놓치지 않게 먹는다. 그 양념마저 얼마나 맛있었는지. 혼자 먹기에는 비싸기도 하고 양도 많아서 꼭 누군가와 같이 사 먹었다. 감자를 들고 M사를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집까지 가는 동안 감자는 야금야금 사라졌다. 감자튀김을 먹을 때면 외롭지 않았다. 마음도, 속도 따뜻했다.
고등학생 때는 라디오의 따뜻한 사연 나누기 코너에 나올법한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봄이었다. 3월 말이어서 날도 풀렸고, 따뜻한 남쪽이라 벚꽃도 만개해서 길도 예뻤다. 고3의 분위기에 적응해나가는 게 쉽지만은 않은 시기였다. 나는 그래도 봄이 왔으니까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산책을 하자고 제안했다. 입이 심심하니 M사에서 감자튀김도 하나 사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깜깜한 밤에 M사를 찾았다.
고3의 하굣길은 일이 학년이 모두 집에 갔기 때문에 보다 조용하다. 10시까지 야자를 한 고3들은 예전처럼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도 않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딘가가 쪼그라져있다. 학원, 과외, 독서실, 집. 각기 다른 곳을 향하는 발걸음들 때문에 길이 몇 갈래로 나뉘지 않았는데도 한산하다. 우리는 그 속에서 밍밍한 국처럼 무미건조했다. 산책도 하나의 기분전환 방법이었다.
그날은 별로 배가 고프지는 않았고 그래서 감자튀김 하나를 나눠먹기로 결정했다. 가게 안에 고등학생은 없고 아저씨들 세네 명만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친구와 나는 반대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감자튀김을 기다렸다. 주문한 감자튀김이 나오기 전에 아저씨들은 계산을 하고 가버렸고 가게는 훨씬 더 조용해졌다. 감자튀김 나왔습니다,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자튀김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주인분은 웃으면서 또 다른 감자튀김을 내밀었다. 아까 나간 손님들이 학생들 힘들 텐데 많이 먹으라고 계산하고 가셨다며 말했다. 감사하고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감자튀김을 받아서 나왔다. 우리는 배가 불렀던 것뿐인데 졸지에 감자튀김이 두 봉지가 되어버렸다. 갑작스럽게 일어날 일들은 우리를 현실에서 튕겨내 버린다. 덕분에 친구랑 오래간만에 입시 걱정을 털어버리고 웃을 수 있었다.
갓 튀긴 감자튀김 두 봉지는 우리에게 넘칠 정도로 따뜻했다. 배부른데 이걸 어떡해, 하면서 각자 열심히 먹었다. 감자튀김을 다 먹을 때까지만 적당히 산책을 하다가 헤어질 예정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 두 바퀴로는 감자튀김 한 봉지를 비울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만성위염을 앓고 있던 때였지만 누군가의 호의를 남기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먹었다.
먹는 시간이 길어서 계속 단지를 돌았고, 먹고 나서는 소화가 안돼서 계속 돌았다. 나는 예상보다 한참 더 늦게 집에 갔고 친구는 독서실에 가지 못하고 바로 집으로 갔다. 밤에 보는 벚꽃은 더 예뻤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밤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세상엔 따뜻한 사람이 많다는 얘기도 했었다. 오래 기억에 남을 밤이었다.
그 후로 M사는 돌연 듯 사라졌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주인아저씨가 시한부다, 아파서 요양을 갔다, 돈을 벌만큼 벌었다, 정말 많은 소문들이 돌았다. 나도 섭섭함을 견딜 수 없었다. 내 추억의 일부가 뚝, 하고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허해서 많이 슬펐다.
이제는 M사도 없어지고, M사 밑의 문방구도 없어지고, 그때 함께했던 친구도 사라졌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달라지고. 나는 쌓여가는데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아직 남아있는 기억들이라도 자꾸 되새기게 된다. 기억하면 잃는 게 아니다. 나는 영원히 그 순간들을 기억할 것이다. 모두가 잊더라도, 나만은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