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Apr 01. 2023

7년 만에 고시엔을 봤다

이야기의 힘이라는 건

고시엔을 보고 싶어. 꿈이라면 꿈이었다. 언젠간, 언젠간, 하고 미루다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꿈. 이상하게 배구만화도, 농구만화도, 그 경기를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야구는 그랬다. 왜냐하면 애들이 간절하게 원하니까. 고시엔을 나가려고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살아나가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야구 만화를 보고 고시엔을 알고 나서, 줄곧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애들이 가고 싶다는 꿈의 무대가 어떤지, 나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이야기는 허구일지라도 그 열기와 간절함은 허구가 아니니까.     

일본 교환이 확정되고 나서 가장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고시엔역에 내려서 구장을 처음 봤을 때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년으로 고시엔 구장이 지어진지 100년이 되는데, 그걸 기념해서 야구만화들과 콜라보를 한 일러스트가 있었다. 고시엔 구장에서 우리 애들을 마주했을 때의 심정이란. 너희 때문에 난 여기까지 왔다고 소리쳐주고 싶었다.      




고작 고교야구를 보러 오사카-사실 고시엔 구장은 효고현에 있지만-까지 왔다고? 모두가 대단한 열정이라고 말했다. 열정이 아니라 그저 집착이었고 애정이었다. 고등학교부터 재수 시절, 그리고 지금도 인생의 힘든 지점에서 내가 지치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 언제나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 건 만화 속 인물들의 간절함이었다. 나는 그 간절함과 노력을 동경했다. 뭐가 그렇게 간절한지, 왜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지,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일본에서 고시엔은 가장 큰 축제 중 하나다. 일본에서 야구, 특히 고교야구를 좋아하는 팬들은 셀 수 없이 많으며 고시엔 시즌만 되면 열도가 들썩인다. 실제 야구 경기에는 관심도 없는 나는 야구를 하는 애들의 이야기를 사랑해서 여기에 왔다. 분명 실제를 바탕으로 만든 게 만화인데 만화 때문에 실제가 궁금해진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고작 야구 만화, 이 야구만화 하나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날 몇 번이나 일으켜 세우고 다시 달리게 만든 것. 나도 너희들처럼 무언가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노력하고 싶다는 마음. 노력하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런 나를 얼마나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지.      




나는 고시엔을 보면서 만화를 떠올리고,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을 추측하면서 그들의 간절함을 상상한다. 분명 거리는 있겠지. 그 거리가 적지는 않겠지. 그럼에도 꿈이 현실이 된 것만 같은 감각은 잊을 수가 없다. 이야기 때문에 나는, 고교야구를 사랑하게 됐다. 시도하지 않았을 일들에 도전하게 됐다.     



그게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이유다.          








어제 있던 소설 수업에서 혹평을 받았다. 문체가 나 같지 않다,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여태 썼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어떤 방향인지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썼는가. 어디 하나 괜찮은 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혹평은 정말 ‘혹평’이라서 받아들이고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때라면 그랬을 텐데. 자가복제라는 말이 떠올랐다. 거기서 거기라는 거지. 그게 한계라는 거지. 결국 나는, 한계가 있는 사람인 게 아닐까? 사실 나 같은 건 재능도 없고, 실력도 없는데 우연히 한 두 번 좋은 글을 쓴 걸로 기고만장했던 게 아닐까? 사실 나는, 작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재능 없는 걸 인정해야 하는 때일 수도 있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쩐지 눈물이 났다. 하필 지하철 안이라서 울지 않기 위해서 눈에 힘을 바짝 줘야만 했다. 나는 글 쓰는 재능이 없어. 그러니까 그만둬야 해. 난 아무것도 아닌데 착각한 거야. 당장이라도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눈을 수없이 깜빡이며 생각했다. 왜 눈물이 나지.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되고 싶으니까.     


되고 싶으니까 눈물이 난 거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나한테는 간절했던 꿈이라서. 나한테는 너무 소중하고, 애틋한 꿈이라서. 너무 되고 싶어서 서러워진 거다. 되고 싶은데 재능이 없으니까. 솔직히 이 정도로 간절한 꿈이라고는 나 스스로도 몰랐다.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    


 

나는 평생 이야기를 먹고살았다. 기억나지도 않는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매일을 이야기를 사랑하며 살았다. 내가 몇 번이고 사랑했던 이야기들은 내 일부가 되어서 나의 하루에 불쑥 불숙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기분에 들떠 잔뜩 사버렸을 때는 비 오는 날 들떠서 편의점에서 잔뜩 사버렸다고 머쓱해하는 레이가, 숨이 막히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허벅지를 때리던 히나타가, 강가를 걸을 때면 외로울 때면 강가로 향한다는 히나가, 지하철을 탈 때면 자기도 사람들과 별다를 게 없다던 츠카사가.      



많은 이야기들을 사랑하면서 인물들이 삶을 대하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도 배웠다. 힘들 때 한 발 더 뻗는 강인함도, 나약함을 인정하는 용기도, 주변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모두. 단 하나의 작품이라도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을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대단한 작품은 못 쓰는 걸 알지만.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냥 힘들 때 열어보고 싶고, 읽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글을. 그게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이었으니까. 내가 행복해진 만큼 사람들도 내 글을 읽고 행복해졌으면. 그거 하나만을 바랐다.           




운동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스포츠만화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노력의 모습을 닮고 싶었으니까. 저렇게 토할 만큼 달려보고 움직이고 싶었다. 아무리 그만두고 싶어도 포기하지 않는 건 걔네에겐 그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포기하면 다 끝이니까. 포기만은 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씩 더 버텨나가게 됐다.     



이미 나는 나이고, 나에게 물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네가 재능이 없다고 하면 포기할 거야?     



그럴 수 있을 리가. 나는 이제 쓰는 즐거움도 알아버렸다. 내가 만든 이야기를, 인물들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한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내 한계는 여기까지였던 거지만 그만두지 않으면 또 다음이 오니까-이것 역시 웹툰 속 대사다-. 괴로울 때면 이야기로 나를 달래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너무 많은 기회가 남아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는 포기하지 않고,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높여나간 인물들을 생각한다. 그렇게 또 나는 이야기에게, 인물에게, 구원받았다.     

 


징징거릴 시간에 한 글자라도 더 쓰자. 부모님이 반대하는 꿈을, 누구에게도 그리 떳떳하게는 말할 수 없는 꿈을, 세상에 보여주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바뀌지 않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만 생각하자. 나에게 주어진 건 시간과 노력뿐이다. 또 지칠 때는 이야기에 힘을 얻어가면서 나아가자. 적어도 물러나지는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라이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