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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Oct 28. 2020

내 머리가 너무 아파서

뭐든 계속 한다면, 다음이 온다

글을 썼다가, 지웠다, 몇 번을 반복했다. 간신히 밤이 되어서야 글을 쓸 수 있었다. 




어제였다. 오랜만에 수채화를 했다. 어린 아이들이 많았기도 하고, 내가 수채화는 곧잘 따라하는 편이라 그런지 선생님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제 그린 건 몇 번 그리지않은 정물화였다. 고동색 꽃병에 보랏빛, 흰빛의 국화가 꽂여있었다. 참고용 그림을 보고서 일부러 무뚝뚝한 붓짓을 따라했다.



꽤 감각 있는 것 같은데. 곧잘 자기만족에 빠지는 나는 조금 뿌듯했다. 미술에 있는 미미한 재능이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은 칭찬에 후한 분이셔서 이번에도 잘했네, 하고 칭찬해주실 것 같았다.





그런데 어제 들은 건 뜻밖의 얘기였다. 우등생 애들이 그린 그림은 꼼꼼하게 섬세한 것에 반해, 그림을 대충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꼼꼼하게 그림을 살펴보지 않고 대충 그린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말에 민감한 나였지만 상처보다는 충격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한 붓질이었다. 그리고 몰라서 안했으면 안했지, 알고서 안한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이제 그만하고 드로잉할래요, 아니면 한 번 더 그려볼래요, 하고 물었다. 선택지가 나눠진 데는 언제나 그렇듯 출제자의 의도가 존재한다. 눈에 뻔하게 보이는 의도를 꿰뚫지 않으면 질문은 의미가 없다.

더 그려보겠다는 말에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더 과감하게 붓을 움직여요. 그림이 살아있지가 않아. 선생님은 내 그림이 평면 같이 딱딱하고 입체감 없는 그림이라고 했다. 왜 과감하게 그리지 않냐는 말에 아주 조금 붓을 마구 휘둘렀다. 묘한 쾌감이 들었다.


한시간 반이 더 지나서야 그림이 완성됐다. 멀리서 보니까 꽤 예쁘네요. 역시 그림은 멀리서 봐야 돼요. 선생님은 뿌듯해했다. 선생님 말대로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난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열심히 살고, 항상 노력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노력은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만의 목적을 추구하며 움직인다. 글을 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건 직관적인 목적. 책을 읽거나 웹툰을 보는 건 힐링을 위해서. 자전거를 타는 건 스트레스 해소와 체력 증진. 공부하는 건 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올해 들어 오랜만에 공적으로 만나게 된 친구들이 하나같이 입모아 말했다. 못 본 사이에 화가 많아졌네. 지나가는 것처럼 말했지만 아마 솔직한 감정일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건 누군가 나의 앞을 방해하는 것. 그리고 내가 계획한 일이 예상치 못한 일로 망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니 꼭 거창한 것 같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그저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거나 과제가 생기고, 갑자기 외출을 해야할 때. 예를 들면 오늘 저녁에 공로상 수상이 오프라인으로 진행된다는 공지를 듣는 것처럼.







태어나서 아파서 열이 난 건 다섯 번도 채 되지않을만큼 몸 하나는 튼튼한 나는 화가 나거나 감정 조절이 되지 않으면 열이 난다. 그런 열은 마음에서 오는 열이라 화만 가라앉히면 금세 괜찮아지지만 그런 열일수록 머리가 더 아픈 법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힘들다. 




그럴 때는 어느 계절이든 창문을 활짝 열고 바람을 맞는다. 휴대폰과 노트북을 끄고 모든 일로부터 떠난다. 그게 유일한 해열제이다.




사실 미술학원도 요즘 나의 두통 원인이 되고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해서 한가지에만 전념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다.



거리가 먼만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더 좋겠다, 그러면 자전거를 따로 안타도 되겠다고 좋아했었다. 하지만 미술학원에 다녀오는 건 그림 그리는 게 두시간 반, 왔다갔다하는 게 사십분이 걸렸다. 한두시에 집에 나가면 네다섯시에 들어오니 이상하게 하루를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내 의지로 시작했지만 온전히 좋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선생님 말처럼 대충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애써 외면했던 마음을 선생님은 알고 있었던 걸까. 





세상일이 그렇듯 항상 즐겁고 좋은 일은 없다. 나는 단지 지고 싶지 않다. 내가 그 일을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알리고 다녔고 나 역시 그 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납득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 좋아하고 싶어서 노력한다. 하다보면 또 좋아지는 날이 있겠지. 



네이버 월요일웹툰 <유일무일 로맨스> 중 40화에서 나온 대사가 있다. 




"네가 하고자하든 마음만 있다면 계속 하는거야. 

계속하면 늦든 빠르든 언젠가 다음이 와. 그럼 또 계속하면 돼."




맞다. 포기하지 않으면 다음은 또 온다. 나의 다음을 기다리며 또 오늘을 쌓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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