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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Oct 21. 2020

시험 보기 좋은 날

얼렁뚱땅 시험을 망친 이야기

시험을 망쳤다. 아마 이 글이 내가 적은 글 중 가장 어두운 첫문장을 가졌을 것 같다.

망친 건 괜찮다. 전공 시험에서 중간고사로 뒤에서 5등을 한 적도 있었다. 겨우 4학기에 재학 중이지만 C+ 하나를 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만은 그저 괜찮지 않았다.



시험을 망친 대학생의 푸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험을 마친 데에는 명백한 이유가 여러 개가 있었다.

제한된 20분의 시작을 빨리하는 바람에 출석을 부르는 동안 시험을 쳤고 시험 내내 교수님은 질문을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어릴 때부터 항상 시험이 무서웠다. 안 그런 사람이 없지만 특히 무서웠다. 망치는 게 두렵고 낮은 점수를 받는 게 두려웠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시험 기간에는 자주 구역질을 했다. 긴장감을 온 몸이 느끼고 있었다.




재수 수능 때는 압박감이 정말 심해서 밥도 못 먹고 잠도 잘 못 잤다. 입시 때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해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국영수 위주로 공부해서 서울대 갔어요, 같은 소리라고 치부했었다. 당연한 말이 당연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막상 해보니 제일 중요한 게 마인드컨트롤이었다.


구역질 몇 번을 하고 나 자신을 타이르는 게 내 일과였다.




수능 당일, 아침에는 떨렸지만 고사장에 도착한 이후에는 나름 괜찮았다. 그래서 불수능이었다는 것도 시험이 끝나서야 알았다. 치는 내내도 멘탈은 괜찮았고 혼자 밥도 잘 먹고 쉬는 시간에는 산책도 했다.



어쨌든 10대 인생의 제일 큰 일이 잘 끝났기 때문에 나는 내가 멘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럴만하지 않았나. 그런데 오늘 시험을 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름 자신 있는 일본어 교양 시험이었다. 본문과 단어도 다 외우고 강의도 다 들었기 때문에 다 맞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은연중에 있었다. 서술형이 하나 있다고 했지만 설마, 싶었다. 기껏해야 단어 한 두개나 문장이지 않을까 했다. 안타깝게도 시험에 나온 건 생각도 못했던 용법에 대한 문제였다.



뒤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열한문제 중에 고작 2번에 그 문제를 마주한 나는 최고 배점인 걸 확인하고는 울면서 문제를 풀었다. 당황해서 머리는 굳고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처참한 점수가 예상된다.









20분 정도를 울적해있다가 이내 기운을 차렸다. 중간고사의 반영비율은 고작 20%다. 나는 언제나 약한 멘탈이지만 회복하는 것도 빨랐다. 이유는 크게 두 개이다. 일단 우울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결과는 나왔다. 그리고 우울한 시간도 아까웠다. 결론은 징징거려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 시간 버리지 말라는 거다.



이런 일이 항상 쉽지는 않지만 나는 또 나를 세뇌시킨다. 괜찮아. 어쩔 거야. 이미 끝났는데. 남은 거 잘치면 되지. 이렇게 우울해할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걸 해.




남에게는 절대 못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잘 알아서, 나를 위로하는 법도 일으키는 법도 안다. 이제 그만 우울해하고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런 기분을 또 느끼기 싫으면 공부해야지. 네가 해야할 게 얼마나 많은데.


 


나에게 있어서만은 우울해할 시간이 있는 것도 여유다. 고작 시험. 100년이 될 내 인생에서 고작 교양 시험 하나. 내 인생의 지분은 얼마나 될까. 많아봐야 0.05%정도지 않을까. 그러면 우울해야할 이유도 없어진다.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난다.  안녕, 우울아. 이제 난 괜찮아.









하루의 끝자락에서 선물 받은 비타음료. 15년을 봐왔지만 여전히 친절한 사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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