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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Dec 13. 2020

무너지라도 한계 앞에서

꿈이 크면 깨진 조각도 크다


저번 주부터, 내가 포기했던 것을 다시 도전하고 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글짓기라는 것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당연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중학교 1학년 때까진가, 2학년 때까지 매일 같이 그림을 그렸다. 다 쓴 연습장이 수십 권도 넘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그렸냐고 묻는다면 좋아했으니까. 그뿐이다. 그 마음이 흘러넘쳐서 매번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그림을 왜 포기했냐면 어느 날이었다. 그저 그렇듯 그냥 어느 날부터 그리고 싶지 않아 졌다. 점점 그리지 않게 되면서 저절로 멀어졌다. 가끔 미술 시간에 하는 그림은 그때의 좋았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는 했지만 잠시였다. 나는 그림 그리는 걸 포기했다. 내가 못 그리는 게 싫어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언니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타블렛으로 몇 년 동안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처음에는 볼품없었던 실력은 언니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례해서 꽤 잘 그리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 언니를 옆에서 보고 있으니 그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난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데. 저렇게까지 열심히 할 자신이 없는데. 그림을 그려서 느껴지는 충족감보다는 나의 실력에 느낄 절망감이 더 클 것 같아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작년에 화상과외 알바를 하게 되었다. 올해 6월까지 했으니 약 7개월 정도 한 셈이다. 화상으로 진행되는 알바인 만큼 타블렛 사용에도 능숙해야 했다.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매일 타블렛을 사용하고 글씨를 쓰다 보니 손에 익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림을 그렸다. 타블렛 사용이 익숙해져서 선을 긋는 게 무섭지 않아서였다. 하나 둘 그리기 시작하다 나의 마스코트도 만들었다. 그걸 바탕으로 인스타그램에서는 그림일기도 업로드하고 있다. 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서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리는 그림은 누구나 좋아할법한 귀여운 그림체의 그림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쾌감은 좋았다. 그리기도 편하고 단순하고. 친구들도 귀엽더라, 잘 그리더라, 하면서 호평을 해주니 그리고 싶은 기분도 더 커졌다. 하지만 이게 진짜 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난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을 그리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상황들을 내가 좋아하는 그림체와 내가 좋아하는 색감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어느 날 새벽에 그린 그림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괜히 뿌듯했다. 그림을 제대로 다시 그린 지 일주일째, 홀로 그림을 연습하고 있다. 수많은 웹툰과 그림들을 보며 내 그림체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왕 내가 그리게 될 그림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고 싶어서 눈매를 고민하고, 얼굴형과 머리카락을 고민하고, 코의 길이와 눈 사이의 간격을 비교하면서 연습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 못 할 정도로 아직까지는 엉망진창이지만 뭐 어떤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흐르는 걸 느끼지 못한다. 



여전히 난 못 그리는 게 두렵다. 내가 못 그리는 걸 알면서 그려야 한다는 게 괴롭고 누군가 내 그림을 보고 못 그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려야 하는 게 두렵다. 하지만 적어도 내 인생에서 가장 빠른 시간은 지금이다. 지금부터 매일 그리면 1년 뒤에는 분명 나아져 있을 것이다. 2년 뒤에도, 3년 뒤에도 더 나아져 있을 것이다. 두려워서 포기했던 열일곱부터 그림을 그렸다면 올해로 5년째였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는 의미가 없다. 단지 난 5년 뒤의 내가 그때부터라도 그렸다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하는 걸 막고 싶다. 언제라도 그림을 그리면서 그리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가장 쉬운 건 포기하는 거다. 내 인생의 모토도 그렇다. 피하고 싶으면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한다. 이제 난 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달려들게 됐다. 껴안는 건 아프지만 견딜만하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끝장을 보자고 다짐한다. 내가 해온 게 최선이었다고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에 나는 너무 어리다. 10년 뒤에도 이걸 계속했을 때, 지금의 내가 한 게 최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만화 속 명대사처럼-배구 만화입니다-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나서, 노력할 수 있는 한계까지 다 노력해보고 나서 난 안된다고 체념해도 늦지 않다. 난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다. 이제 첫 발이다. 체념하더라도 그 벽의 앞에서 체념하고 싶다. 멀리서 벽이 있는 게 흐릿하게 보인다고 벽 근처에도 가지 않은 채 주저앉고 싶지 않다. 부딪히러 가자. 여기가 한계라고 울부짖으러 가자. 난 나의 한계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이다. 누가 이기는지, 한 번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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