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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an 03. 2021

백 번 맞았다고 그다음이 안 아플 리가

아픈 건 계속 아프다



가끔 들뜨는 날이 있다. 왜, 다 될 것 같은 날. 괜히 다 될 것 같고 그 기대에 몇 날 며칠을 부풀어 지내다 보면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사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그게 아니었을 때의 실망감은 지하 깊숙이 내동댕이 쳐지는 기분이라 사람을 한순간에 우울의 끝으로 몰아넣는다.





기대했던 활동이 있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분량이 정해지지 않은 지원서도 누구보다 잘 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루를 들뜬 기분으로 보냈다. 하지만 떨어졌다. 믿을 수가 없어서 명단을 다섯 번이나 확인했다. 거듭되는 확인사살은 더 믿을 수 없게 됐다. 왜 내가? 왜 날 떨어뜨렸지? 엄마는 그것도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많이 맞아야 맷집이 좋아진다고, 더 성숙해진다고 했다.






나도 안다. 그게 맞는 말이라는 걸. 우리는 언제까지나 모든 실패나 상실에 우울해할 수 없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고 다음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회라고 해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지한다면 우울을 멈춰야 한다는 것도, 이 우울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매를 백 번 맞았다고 그다음이 안 아플 리가 없다. 백한 번도 아프고, 백두 번도 아플 것이다. 그저 얼마만큼의 아픔이 오는지만을 어렴풋이 생각해볼 뿐이다. 그리고 그 아픔에 처음만큼 슬퍼하지 않고 점차 무뎌진다. 




나를 지나치게 연민하면 좋은 게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는 딱 정해놓은 시간만큼만 아프기로 했다. 그 시간만큼은 지독하게 아팠다. 뭐가 문제였는지 생각해보기도 하고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에 끝없이 왜라고 외쳐보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아픔을 보내줄 시간이 찾아온다. 이 정도면 충분히 슬퍼했지, 하고 나는 슬픔 하나를 떠나보낸다. 





참으로 이상한 건 나는 아플 때 단단해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극단의 상황들이 언젠가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끔 그런 상황에 내가 놓이길 바라기도 한다. 잔인하게도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성장하게 된다. 아프지 않을 때는 가끔 일부러 흉터를 쑤신다. 너 이때 아팠잖아, 이때 속상했잖아, 하고 기억 저편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끌어모은다. 그러면 다 나은 상처도 아플 때가 있다. 




상처 입을 때마다 나는 단단해진다. 그래도 나는 아직 아픈 게 싫다. 가끔은 내가 일부러 아프게 만들지만 그래도 아픈 게 싫다. 도망갈 수 있다면 아픔으로부터 마음껏 도망가고 싶다. 아무리 아팠다 하더라도 기억 속에서 아픔을 꺼내는 것과 다시 아픔을 겪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니까. 하지만 도망갈 수 없는 아픔에서 작은 주문을 건다. 단단해져라, 단단해져라. 아픈 만큼 나는 단단해질 거니까 지금은 괜찮아. 그게 나의 최대한의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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