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금서를 읽었다

아무렇지 않아서 더 슬픈 마음

by 한열음

82년생 김지영. 여러 의미에서의 논란을 불러왔던 작품이다.

이 책을 비꼬는 글도 있었고 메갈이니 방구석 페미들이라며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말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이걸 읽는 게 두려웠다.



분명 나도 공감하고 이해할 내용들이었지만 그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언젠가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만 생각하다 몇 달 전 영화를 봤고 괜찮았다.

그러다 어느 날 찾아간 도서관에서 책과 눈이 마주쳤다. 집에 들고 오면서도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도대체 이 책에는 무슨 이야기가 적혀있었길래 사람들은 그렇게 글을 비하하고 남을 비하하고 화를 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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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데 걸린 한 시간 동안, 가끔은 울었고 가끔은 덤덤했다. 아직도 나는 왜 이 글에 대해 화내는 이들이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 글은 남성을 혐오하지도 않고 남성은 모두 쓰레기이고 죽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는다. 그저 김지영이 인생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여성들이 만들어낸 판타지라며 과장하지 말라며 화를 내는 댓글들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주위에서 들은 얘기가 절반, 내가 겪은 것이 절반이었다. 나 또한 김지영이었고 내 주변 사람들도 김지영이었다. 인간은 어째서 자신이 겪지 않은 일에 대해 그렇게 쉽게 단정하는 것일까?





우리는 단지 우리가 겪은 걸 이야기했다. 그런데 왜 길길이 화를 내며 자신들도 차별받았다, 메갈 돼지들에게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며 말하는 걸까?




엄마가 어느 날 말했다. 초등학생 애들이 욕으로 메갈이라고 한다는데 이게 무슨 말이야? 언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경상남도에 위치한 우리 집은 김지영의 순한 맛이다. 아빠는 지금은 딸이라면 껌뻑 죽는다는 딸바보지만,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아들이 아니라서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엄마가 새벽 1시 46분 나를 낳는다고 병원 침대에서 힘을 쓰고 있을 때도 아빠는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을 때면 꼬추 하나 못 달고 태어나서 그랬냐고, 그 달랑거리는 꼬추하나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말한다. 가끔은 아들놈 하나 더 태어났으면 나는 내다 버렸을 거라고도 말한다. 아빠는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그랬을 거다.





시댁에 가면 엄마는 일을 하고 아빠는 눕는다. 친정에 가면 엄마는 외할머니가 안타까워서 또 일을 하고 아빠는 또 눕는다. 명절 때면 남자가 먹고 나면 여자가 먹는다. 배고프실 텐데 어른들-다 남자들이다-식사를 얼른 차려드려야 하는데, 하고 말하는 걸 보면 속으로만 염병, 하고 중얼거린다.



할머니는 암에 걸리셨다. 그 후로도 계속 간간히 아프셨다. 하지만 암투병을 하는 와중에도 삼시세끼 밥상을 차리셨다. 그 얘기가 생각날 때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외갓집에서는 같이 먹기는 한다. 단지 남자들은 멀쩡한 상에서 먹고 여자들은 이어 붙인 작은 상에서 먹는다. 먹다가도 남자가 물을 달라고 하면 부엌에 가서 물을 가져와야 한다. 우리 장손은 이리 와야지, 하고 어른들은 말한다. 할아버지, 외삼촌 둘, 사촌오빠와 아빠가 앉아있는 그 밥상은 재수가 없다.





상을 차릴 때 엄마는 나와 언니에게만 시켰다. 우리가 접시를 나르고 수저를 놓는 동안 왜 오빠는 안방에 누워서 게임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중학생 때쯤 그걸로 한바탕 한 이후로는 우리도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오빠도 같이 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외갓집은 친척이 많아 장손을 좋아하는 어른들도 많다. 집안을 이끌어갈 장손이라고 어깨를 두드릴 때마다 좀 불쌍하기도 하지만. 우르르 들어오는 어른들은 장손부터 찾는다. 우리 장손, 우리 장손, 하면서 대놓고 용돈을 더 많이 준다. 그럴 때면 짜증 나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다.





단지 사촌동생과 하나 약속했다. 오빠 여자 친구가 결혼하러 온다고 하면 꼭 도망치라고 얘기하자. 다섯 살 어린 동생은 격하게 동의했다. 그 동의에는 많은 말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여전히 유리천장은 너무 단단하고, 리얼돌은 여성 인권과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나는 아직도 스타벅스를 볼 때마다 된장녀가 떠오른다. 웃긴 건 커보니까 제일 싼 게 스타벅스다.



그래도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10년 뒤에는 세상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나도 좋아진 세상의 일부가 되고 싶다. 금서는 생각보다 아무 맛이 나지 않아서 너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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