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터 없는 여성의 끈질긴 생명력|넷플릭스 시리즈 추천 리뷰 <투 머치>
리나 던햄이 돌아왔습니다. 10여 년 전 HBO 시리즈 <걸스>(Girls)로 그녀가 시작했던 세대적 담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서 말이죠. 발칙하고 담대한 쇼로, 말 그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걸스>의 감독과 각본, 주연을 맡았던 ‘그’ 리나 던햄이 넷플릭스 시리즈 <투 머치>(Too much)와 함께 2025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앤드류 스콧, 나오미 왓츠, 제시카 알바, 리타 오라도 함께요.
HBO 시리즈 <걸스>의 등장은 문화적 지진과도 같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한 세대의 당돌하고 발칙한 선언이었죠.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방영된 이 시리즈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히고, 자기중심적이며, 야심 차지만 미성숙한 밀레니얼 세대의 모습을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그려냈습니다.
<걸스>는 당시 텔레비전의 규범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빼곡한 문신으로 뒤덮인 플러스 사이즈 여성의 몸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인 섹스 장면을 통해 여성의 신체가 오직 성적 대상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관념을 전복시켰죠.
이러한 ‘날 것’의 미학은 캐릭터와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특히 <걸스>는 무명이었던 배우 아담 드라이버를 발굴한 작품으로 자주 언급되죠. 그가 연기한 문제적 예술가 아담 새클러는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민망하고 혐오스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 복합적인 인물이었고, 드라이버의 완벽한 연기는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습니다.
<걸스>는 이처럼 불편할 정도로 솔직한 묘사를 통해 한 세대의 불안과 욕망을 포착했고, 그 유산은 10년이 지난 지금<투 머치>의 배경에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투 머치>는 <걸스>가 남긴 20대 자아 발견의 혼란스러운 텍스트 위에 30대의 사랑과 불안의 새로운 이야기를 덧씌웁니다. 10년 간의 개인적, 문화적 변화라는 렌즈를 통해 재검토되는 의도된 메아리죠. 리나 던햄은 시간이 지난 만큼 더 성숙해졌습니다. 청춘이 겪는 문제들은 여전히 차고도 넘치지만, 그것을 다루는 도구, 감수해야 할 대가, 그리고 희망을 품는 능력은 심오하게 무르익었습니다.
던햄은 의도적으로 <투 머치>의 주연을 맡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녀는 코미디 시리즈 <핵스>(Hacks)에서 두각을 나타낸 메건 스톨터를 주인공 제시카 역으로 캐스팅하고, 자신은 제시카의 언니이자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조연 노라 역을 맡았죠.
먼저 이 역할 변화는 자기 보존의 행위이자 과거와의 화해 시도입니다. 던햄은 <걸스> 시절, 자기 신체와 외모에 대해 무자비한 대중의 비난에 시달렸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내 몸이 다시 해부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이 경험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또한, 이 캐스팅은 작품에 메타적 서사를 부여합니다. <투 머치>는 던햄 자신의 실제 경험, 즉 오랜 연인과의 이별, 런던으로의 이주, 그리고 현재의 남편인 뮤지션 루이스 펠버와의 만남을 바탕으로 한 반자전적 드라마입니다. 그녀는 스톨터라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개성 있는 코미디 페르소나를 지닌 배우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세움으로써 흥미로운 ‘작가-아바타’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로써 던햄은 작품 속에서는 말 그대로 ‘언니’로서, 작품 밖에서는 창작자로서 한 발짝 물러나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 예를 들어 고통스러운 이별, 전 연인의 새 여자친구에 대한 소셜 미디어 스토킹 등을 안전하고 성숙한 거리에서 재검토하게 됩니다. 이 거리는 날것의 자서전을 보다 통제되고 성찰적인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킵니다. <투 머치>의 스탤터의 연기에서 던햄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되며, 이는 던햄의 작가적 목소리가 지닌 지속적인 힘을 증명합니다.
제시카(메건 스톨터)는 끔찍한 이별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워커홀릭 뉴요커’입니다. 그녀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로 분노에 가득 차 창문에 주먹을 날리는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무절제하고, 대립을 피하지 않는, 한 마디로 ‘투 머치’한 인간입니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10년 전 <걸스>에서 던햄이 시작했던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미의 기준에서 벗어난 여성을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죠. 제시카의 ‘과함’은 감정뿐만 아니라 신체적, 스타일로도 드러납니다. 그런데도 그녀가 매력적인 연애의 상대로 그려지고, 사랑받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 자체가 기존의 캐스팅 관습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입니다. 이는 해나 호바스가 10년 전 텔레비전에 등장했을 때와 동일한 파괴력을 지닙니다.
<투 머치>의 핵심 서사 중 하나는 제시카가 전 남자친구의 새로운 연인이자 인플루언서인 웬디(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의 소셜 미디어를 강박적으로 염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녀는 웬디를 향한 분노와 자괴감이 담긴 영상을 비밀 계정에 녹화해 비공개로 올리기까지 하죠. 이 설정은 던햄이 뮤지션 잭 안토노프와 결별한 후 겪었던 실제 경험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우리는 인스타그램 릴스 지옥에 갇혀있느라 정작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지 못합니다. <투 머치>는 이러한 현대인의 불안이 어떻게 기술에 의해 매개되고 증폭되는지를 예리하게 포착하죠. <걸스>의 불안이 주로 내면이나 대인 관계, 즉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탐구, 경제적 불안정, 사랑에 대한 갈망 등에 기반했다면, <투 머치>의 불안은 외부적으로 매개되고 기술에 의해 증폭됩니다. 제시카의 고통은 더 이상 사적인 슬픔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스타그램이라는 글로벌 무대 위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 상연되는 공적인 퍼포먼스가 됩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불안에 허덕이다 결국 불안에 중독되어 버린 사람들입니다. 행복하면 불안해지고, 나에게 이런 좋은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부정하며 끝내 스스로 모든 걸 망가뜨리고야 마는 ‘사보타주’의 달인들이죠. 그리고 우리는 누군가의 불행을 봐야 진정을 찾습니다.
디지털 자해의 순환 고리에 빠진 제시카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은 완벽하게 구현됩니다. 제시카는 인스타그램으로 웬디의 완벽해 보이는 삶을 소비하고, 이는 그녀의 고통을 가중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다시 그녀 자신만의 반응적 콘텐츠, 분노의 영상을 생산하는 연료가 됩니다.
이 시리즈는 현대인의 트라우마, 피해망상, 애정결핍이라는 고전적인 던햄의 주제들이 이제 ‘관심 경제’의 구조 속에서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진정한 연결이 콘텐츠 소비로 대체되며 우리는 모두 공허함 속에서 허덕이죠. 이처럼 <투 머치>는 밀레니얼 세대의 문제를 지난 10년 사이 더욱 기술적으로 복잡해진 새로운 시대를 위해 성공적으로 업데이트합니다.
런던의 인디 뮤지션 펠릭스(윌 샤프)는 제시카와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그는 제시카에 비해 훨씬 절제되어 있고, 시청자가 그의 매력을 보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죠. 그는 재능은 있지만 커리어는 정체된 ‘한물간 인디 뮤지션’으로 중독 문제와 씨름하고 깊이 상처 입은 영혼에 시름합니다.
<걸스>가 아담 드라이버를 세상에 알렸듯 <투 머치>는 윌 샤프라는 배우를 재발견하는 무대가 됩니다. 두 배우 모두 ‘고뇌하는 예술가’라는 원형을 연기하지만, 아담 새클러의 카리스마가 공격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며, 때로는 위협적이었다면, 펠릭스의 매력은 조용하고 상처 입은 내면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포식자가 아니라 또 다른 환자입니다. 그가 제시카에게 가하는 위협은 그녀의 안전이 아니라, 그녀의 자기 파괴적인 패턴, 그 자체의 또 다른 복제품입니다. 그는 제시카의 혼돈을 다른 방식으로 비추는 거울과도 같죠.
제시카와 펠릭스는 서로를 망치는 ‘재앙적 커플’로 규정됩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싸우고, 신뢰 문제로 갈등을 겪습니다. 하지만 <걸스>에 나온 많은 커플들과 달리 이 쇼는 시청자들이 적극적으로 이 커플을 응원해 주길 바랍니다.
이러한 변화는 ‘재앙적 커플’이라는 개념이 허무주의적인 것에서 희망적인 것으로 진화했음을 보여줍니다. <걸스>의 로맨스가 종종 상호 파괴나 거래적 필요에 관한 연구였다면, <투 머치>의 로맨스는 상호 치유에 대한 탐구입니다. 던햄 자신도 과거 자신의 작품이 “낭만적으로 비관적이었다”라고 인정합니다. 반면 <투 머치>의 중심 갈등은 ‘그들이 서로를 파괴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두 상처받고 무너진 개인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지지대가 될 수 있는가?’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던햄의 개인적 성장에서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낙관주의가 자신의 남편을 만난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고 밝혔습니다. “루를 만나고 나서, ‘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라는 느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고 말이죠.
따라서 이 쇼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획득된 낙관주의’에 있습니다. 이것은 순진한 동화 같은 로맨틱 코미디가 아닙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 개종한 냉소주의자가 쓴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이 작품은 혼돈, 트라우마, 위험 신호, 그리고 사랑의 순전한 어려움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연결’은 가능하며, 충분히 싸울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 문화는 종종 낙관주의와 직접적인 감정 표현을 특징으로 합니다. 제시카는 이러한 미국의 정서를 체화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필터 없이 쏟아내고,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반면, 영국 문화는 전통적으로 절제와 냉소, 그리고 자기비하적 유머를 중요한 소통 방식으로 삼습니다. 펠릭스의 조용하고 내성적인 태도는 이러한 영국적 정서와 맞닿아 있죠.
이러한 차이는 작품의 제목인 ‘투 머치(Too Much)’라는 표현 자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미국인인 제시카에게 이 말은 비난이자 거절의 의미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투 머치’는 때로 ‘딱 충분하면서도 약간 더 많은’, 매력을 의미하는 애정 어린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같은 단어가 대서양을 건너며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언어적 간극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오해와 매력의 근원이 됩니다.
한편, <투 머치>는 미국인들이 흔히 갖는 런던에 대한 낭만적 환상을 영리하게 활용하고 또 전복시킵니다. 제시카와 펠릭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펠릭스는 제시카에게 <더 크라운>이나 <브리저튼>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냐고 물으며 사랑스럽게 비아냥거립니다. 이는 미국인들이 영국을 왕실과 귀족의 역사, 혹은 시대극의 판타지로 소비하는 경향을 꼬집는 동시에 이 드라마가 그런 환상과는 거리가 먼, 현재 런던의 지저분한 현실을 보여줄 것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작품은 이후 <브리저튼> 시대의 옷을 입는 짧은 판타지 장면을 삽입하는데, 이는 제작진이 이러한 클리셰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의도적으로 비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인 오스틴 소설이나 리처드 커티스 영화 속 런던을 기대했던 제시카는 실제로는 비싼 집세와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사라져가는 라이브 공연장 등 냉정한 현실과 마주합니다. 이는 역사가 짧고 광활한 미국과 달리, 길고 복잡한 역사를 지닌 작은 섬나라 영국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투 머치>는 미국인의 낙천성과 영국인의 냉소주의라는 스테레오타입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제시카의 과장된 감정 표현이 이별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방어기제임을, 펠릭스의 과묵함이 깊은 가족사와 중독 문제라는 상처를 감추기 위한 갑옷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드라마는 문화적 차이라는 표면 아래에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취약함과 사랑을 통해 성장하려는 노력을 조명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문화적 다름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앙적 커플’임에도 불구하고 제시카와 펠릭스의 관계가 희망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혼돈 속에서 빛나는 작은 다정함의 순간들 때문입니다. 제시카가 펠릭스의 복잡한 과거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판단 없이 그의 트라우마를 들어주는 장면이 그 예죠. 또한 펠릭스는 제시카의 전 남자친구가 거의 해주지 않았던 사소한 배려, 예를 들어 그녀에게 차를 가져다주거나 그녀의 반려견을 챙기는 행동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획득된 낙관주의’는 마지막 화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성이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장면은 로맨틱 코미디의 익숙한 클리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나 던햄은 이 클리셰의 구조를 빌려와 그 안에 전혀 다른 내용물을 채워 넣음으로써, 이를 단순한 상투적 결말이 아닌, 작가적 성숙과 주제 의식을 담은 강력한 장면으로 탈바꿈시킵니다.
이 장면이 특별한 첫 번째 이유는 던햄 자신의 과거 작품과의 단절에 있습니다. <걸스>는 여성 간의 우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이기적이며,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었죠. 친구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경쟁하며, 결국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만약 <투 머치>가 <걸스>의 연장선에 있었다면, 제시카와 웬디의 관계는 파괴적인 대결이나 서로에 대한 영원한 경멸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투 머치>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는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해묵은 서사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극적인 폭로나 싸움이 아닌, 조용하고 사적인 대화로 이루어집니다. 이들의 화해는 남자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서의 승패가 아니라, 한 남자로부터 비롯된 각자의 상처를 공유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웬디는 제시카에게 전 남자친구 제브가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했음을 털어놓습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더 이상 연적이 아니라, 같은 종류의 기만과 상처를 경험한 피해자로서 서로를 마주 보게 됩니다.
이 화해는 승리나 행복의 정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상실과 슬픔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클리셰를 벗어납니다. 제시카는 펠릭스와의 이별과 반려견의 죽음이라는 이중의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바로 이 가장 취약한 순간에 웬디가 손을 내민 거죠. 이 장면의 배경에 흐르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Bigger Than the Whole Sky’는 상실의 슬픔을 노래하는 곡으로, 던햄에 따르면 이 장면의 모든 감정을 대변하기 위해 선택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들의 연대는 ‘걸 파워’를 외치는 가볍고 통쾌한 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잔해 속에서, 서로의 고통을 알아본 두 인간이 조용히 서로를 위로하는 성숙하고 현실적인 연대입니다. 이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획득된 낙관주의’의 증거 중 하나입니다. 행복은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때로는 가장 어두운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작은 빛처럼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죠.
결론적으로, 제시카와 웬디의 화해는 클리셰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그 핵심은 던햄의 작가적 진화, 여성 서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 그리고 삶의 복잡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얻게 되는 성숙과 연대의 가능성에 관한 진솔한 탐구입니다.
<투 머치>의 철학적 심장은 제시카와 펠릭스가 나누는 짧은 대화에서 가장 세차게 뜁니다. 이 대화는 단순한 말다툼을 넘어, 밀레니얼 세대가 ‘어른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살아내고 있는지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선언이자, <걸스> 이후 10년간 이어진 세대 담론의 핵심적인 진화입니다.
제시카가 펠릭스에게 던지는 질문, “어른이 된다는 건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들의 연속 아니야?”는 밀레니얼 세대가 겪어온 경제적, 사회적 현실을 압축합니다. 이들은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며 여러 차례의 재정 위기를 겪었고, 노력과 보상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감했습니다. 그 결과, 이전 세대가 가졌던 ‘성장’ 대한 낙관주의 대신, ‘생존’을 위한 현실주의가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카의 정의는 단순한 비관이 아니라, ‘번아웃 세대’의 생존 전략에 가깝습니다. 과도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꿈’이나 ‘자아실현’ 같은 거대 담론은 사치가 되었고, 그 자리를 ‘워라밸’과 ‘안정’에 대한 갈망이 채웠습니다. 그녀의 체념은 <걸스>의 해나 호바스가 보여준 ‘어른 되기의 거부’와는 다릅니다. 해나는 책임을 회피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중이라고 선언했지만, 10년 후의 제시카는 어른의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그 책임을 최소한의 감정 소모로, 의무의 이행으로만 정의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펠릭스는 반론을 펼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며 제시카의 체념에 정면으로 맞서죠. 단순히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가치와 열정을 일과 삶에 적극적으로 통합하고 싶어 합니다.
펠릭스의 이러한 정의는 순진한 낭만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나’의 가치와 취향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합리적 선택에 가깝습니다. 조직을 위한 희생이 더 이상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세대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자기 투자이자 동기 부여 방식입니다. 성공하지 못한 뮤지션으로서의 펠릭스의 삶이 보여주듯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결국 이 대화는 <투 머치>가 <걸스>로부터 얼마나 멀리, 그리고 깊이 나아갔는지를 보여줍니다. <걸스>의 질문이 ‘어떻게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였다면, <투 머치>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어른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입니다. 제시카와 펠릭스의 로맨스는 단순히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체념적 현실주의와 주체적 이상주의라는 두 가지 생존 방식이 충돌하고, 타협하며,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이는 리나 던햄이 20대의 ‘순수한 감정’을 넘어 30대의 ‘지혜’를 통해 세대 담론을 한층 더 성숙한 차원으로 이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시리즈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과거와 정직하게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는 지저분하고 불안에 떠는 ‘걸(Girl)’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대신, 25살이 아닌 35살의 그녀는 어떤 모습인지 묻습니다. 실연, 불안, 사랑에 대한 탐색과 같은 ‘클리셰’들은 인간 조건의 변치 않는 상수입니다. 이 작품의 특별함은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에 있습니다.
리나 던햄의 작업은 바로 이 전환의 과정을 기록한 독특한 연대기입니다. <걸스>가 막 정의되고 조롱받기 시작한 한 세대의 자기 선언이었다면, <투 머치>는 10년의 지혜와 피로를 안고 과거의 잔해와 새로운 불안 속에서 어떻게 삶을 구축할 것인지 고민하는, 바로 그 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에밀리, 파리에 가다>와 같은 반짝이는 판타지가 동시대에 공존하기에, <투 머치>의 지저분한 진실성은 더욱 귀하고 필요하게 느껴집니다.
<투 머치>는 결국 우리가 ‘덜’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당신이 ‘딱 충분하면서도 약간 더 많은’ 존재임을 알아봐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혹은 당신이 그런 ‘투 머치’한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죠. “투 머치”라고 말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투 머치”라고 톤을 낮춰 말하는 사람들을 찾아 지금 당장, 떠나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