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어쩔수가없다>는 어떤 작품들과 경쟁할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제이자 칸, 베를린과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니스 국제 영화제가 2025년 8월 27일부터 9월 6일까지 82번째 막을 올립니다.
베니스는 단순한 영화 축제를 넘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오스카 시즌의 실질적인 개막을 알리는 전초전으로서 그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죠. 특히 2025년, 베니스는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와 스트리밍 거물, 그리고 전 세계의 가장 주목받는 아트하우스 시네마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가장 중요한 전장으로 그 입지를 다시 한번 공고히 할 전망입니다.
2025 제82회 베니스 영화제의 주제는 '괴물'
올해 영화제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테마는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직접 언급한 '필 루즈(fil rouge, 공통된 실)'인 '괴물(Monsters)'입니다. 이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조물처럼 문자 그대로의 괴물부터,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가 다룰 블라디미르 푸틴이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무아마르 카다피 같은 20세기의 실존했던 괴물,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의 전쟁, 핵 위협과 같은 이 시대의 거대한 괴물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하고도 시의적절한 개념입니다.
이러한 주제 의식 아래, 제82회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은 몇 가지 뚜렷한 경향을 드러냅니다.
첫째, 작년의 소극적인 행보와 달리 세 편의 강력한 우승 후보를 앞세워 리도섬에 화려하게 귀환한 넷플릭스의 공습과 아트하우스 스트리밍 플랫폼 무비(Mubi)의 약진이 두드러집니다.
둘째, 가자 지구 분쟁, 푸틴의 부상, #MeToo 운동 등 동시대의 가장 민감하고 뜨거운 정치적, 사회적 서사를 과감하게 스크린으로 소환하며 영화제가 시대와 호흡하는 공론장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박찬욱 감독의 필생의 역작 <어쩔수가없다>와 한국의 CJ ENM이 공동제작에 참여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부고니아>가 나란히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세계 영화계의 핵심 플레이어로 부상한 한국 영화의 새로운 위상을 증명합니다.
이러한 작품들을 심사할 심사위원단은 <사이드웨이>, <디센던트>의 알렉산더 페인 감독이 위원장을 맡고, 스테판 브리제, 마우라 델페로, 크리스티안 문주, 그리고 이란의 모함마드 라술로프 등 사회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깊은 통찰을 보여 온 감독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의 성향은 올해 황금사자상의 향방이 단순한 예술적 성취를 넘어 시대적, 사회적 함의를 얼마나 담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 21편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놓고 리도섬에서 뜨거운 경쟁을 펼칠 21편의 공식 경쟁부문(Venezia 82) 초청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목록은 올해 세계 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경향과 주목할 만한 이름들을 한눈에 보여줍니다.
주요 경쟁작 심층 분석: 감독, 시놉시스, 그리고 기대 포인트
황금사자상을 향한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몇몇 작품들은 그 감독의 명성, 주제의 파격성, 그리고 산업적 함의로 인해 일찌감치 전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올해 베니스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됩니다. 이 영화는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으로, 박찬욱 감독이 10년 이상 마음에 품고 개발해 온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죠.
영화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The Ax』를 원작으로 한 블랙 코미디 스릴러입니다. 수년간 헌신했던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된 평범한 중년 가장 '만수'(이병헌)가 가족과 집을 지키기 위해 재취업 시장에서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면서 벌어지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이야기를 그립니다.
박찬욱 감독은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이 프로젝트를 언급한 이후, 이를 "평생의 프로젝트"이자 "가장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공공연히 밝혀왔습니다. 그는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프랑스 영화(<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 2005)와는 별개로 원작 소설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으며, 특히 주인공 아내(손예진)의 역할을 원작보다 강화하여 도덕적 딜레마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각색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영화의 베니스 경쟁부문 초청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2012년 이후 한국 장편 극영화로서는 13년 만의 쾌거로, 한국 영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박찬욱 감독 본인에게도 <친절한 금자씨>(2005) 이후 20년 만의 베니스 경쟁부문 복귀입니다. 감독은 "그 긴 세월 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벅찬 소감을 밝혔고, 생애 첫 베니스 레드카펫을 밟게 된 손예진은 "꿈만 같다"며 감격을 표했죠.
<어쩔수가없다>가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감독과 배우의 명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알베르토 바르베라 위원장이 제시한 '괴물'이라는 테마를 가장 현실적이고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파고듭니다. 영화 속 '만수'는 선천적인 악인이 아닙니다. 그는 극심한 고용 불안과 무한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개인을 어떻게 괴물로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시대가 낳은 비극적 산물입니다. 이는 사회 비판적 시각을 지닌 작품에 주목해 온 심사위원단의 성향과 완벽하게 부합하며, 단순한 장르 영화를 넘어 강력한 사회적 알레고리로서 기능할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이 지점이 바로 <어쩔수가없다>가 황금사자상에 가장 근접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핵심적인 이유입니다.
<가여운 것들>로 2023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던 그리스의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불과 2년 만에 엠마 스톤, 제시 플레먼스와 함께 <부고니아>로 리도섬에 돌아왔습니다. 이 작품은 장준환 감독의 2003년 한국 컬트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영어로 리메이크한 것으로, 한국의 CJ ENM이 공동제작사로 참여해 K-콘텐츠 IP의 글로벌 확장이라는 산업적 의미까지 더했습니다.
영화는 거대 제약회사의 CEO(엠마 스톤)가 지구를 파괴하려는 외계인이라고 굳게 믿는 두 명의 음모론자(제시 플레먼스 등)가 그녀를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소동을 그립니다. 원작의 독창적인 상상력에 란티모스 특유의 부조리한 유머와 서늘한 서스펜스가 결합되어 또 한 편의 독보적인 작품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를 모읍니다. 엠마 스톤은 이 프로젝트에 대해 "집단적 편집증이 어떻게 공유된 진실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매력적이었다"고 밝히며, 영화가 현실과 망상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를 탐구하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부고니아>는 '괴물'이라는 테마를 두 가지 층위에서 탐구합니다. 하나는 음모론에 사로잡혀 기이한 행동을 벌이는 주인공들이라는 '인식의 괴물'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의 납치 대상인 거대 자본을 상징하는 CEO라는 '시스템의 괴물'입니다. 란티모스는 이 두 괴물의 충돌을 통해 진실과 거짓,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더 나아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작가 감독이 한국 영화의 IP를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고, 한국의 메이저 투자배급사가 제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이 모델은 K-콘텐츠가 단순한 소비의 대상을 넘어 글로벌 창작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어쩔수가없다>와 함께 <부고니아>의 경쟁부문 동반 진출은 2025년 베니스가 한국 영화의 달라진 위상을 확인하는 무대가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올해 베니스의 '괴물' 테마를 가장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작품은 단연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입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로 2017년 황금사자상과 이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석권했던 델 토로는 메리 셸리의 고전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꿈"이었다고 밝혀왔습니다. 넷플릭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오스카 아이삭이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을, <솔트번>의 제이콥 엘로디가 '피조물' 역을 맡았으며, 미아 고스, 크리스토프 왈츠 등 화려한 출연진이 합류했습니다.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공포 영화를 넘어,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피조물의 고통과 분노를 통해 '누가 진짜 괴물인가?'라는 원작의 철학적 질문을 깊이 있게 파고들 것으로 보입니다. 델 토로는 언제나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내왔으며, 그의 '피조물' 역시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는 복합적인 캐릭터로 그려질 전망입니다.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은 "델 토로가 이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며 "장관인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말해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이 작품은 넷플릭스가 올해 오스카 시즌을 겨냥해 내놓은 가장 강력한 카드 중 하나입니다. 넷플릭스는 <프랑켄슈타인>을 필두로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제이 켈리>까지 총 3편의 유력 작품을 경쟁부문에 진출시키며, 작년 베니스에서의 상대적 부진을 만회하고 시상식 시즌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영화제의 중심 테마를 관통하는 상징성과 델 토로라는 거장의 존재감, 그리고 넷플릭스의 막강한 지원을 등에 업고 영화제 기간 내내 가장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설 것입니다.
<허트 로커>로 여성 감독 최초의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이라는 역사를 쓴 캐서린 비글로가 2017년 작 <디트로이트> 이후 8년 만에 신작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로 돌아옵니다.
이드리스 엘바, 레베카 퍼거슨, 그레타 리 등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하는 이 영화는 미국을 향해 발사된 정체불명의 미사일 공격에 직면한 백악관이 책임자를 찾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그린 숨 막히는 정치 스릴러입니다.
비글로 감독은 <제로 다크 서티>, <허트 로커> 등을 통해 군사, 정치 스릴러 장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리얼리즘과 긴장감을 선보여왔죠. '미사일 위기'라는 영화의 설정은 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분쟁 등 현재의 불안정한 지정학적 상황과 직접적으로 공명하며, '전쟁'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공포를 스크린에 되살려낼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남성 중심적인 장르 안에서 꾸준히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그려온 비글로 감독이기에, 레베카 퍼거슨이 연기할 캐릭터가 위기 상황 속에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지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입니다.
올해 경쟁부문에 초청된 6명의 여성 감독 중 가장 높은 명성을 지닌 비글로의 존재는 베니스 영화제의 성 평등 담론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녀의 8년 만의 귀환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결혼 이야기>, <프란시스 하>의 노아 바움백 감독은 넷플릭스와의 성공적인 파트너십을 이어가며 신작 <제이 켈리>를 선보입니다. 조지 클루니가 유명 배우 '제이 켈리' 역을, 아담 샌들러가 그의 오랜 매니저 역을 맡았으며, 로라 던, 빌리 크루덥 등 쟁쟁한 배우들이 함께합니다. 영화는 유럽을 여행하는 두 친구가 자신들의 삶과 관계, 그리고 남겨질 유산을 되돌아보는 과정을 그린 '가슴 아픈 코미디'로 알려졌습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괴물'은 외부의 위협이 아닌, 나이 들어감에 대한 불안, 지나간 삶에 대한 후회, 오랜 관계의 균열과 같은 지극히 내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바움백 특유의 지적이고 날카로운 유머, 그리고 배우들의 페이소스 짙은 연기가 어우러져 또 한 편의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제이 켈리>는 넷플릭스의 오스카 전략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넷플릭스는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거대하고 장르적인 작품과 <제이 켈리>처럼 섬세하고 인간적인 드라마를 동시에 경쟁에 내보냈습니다. 이는 다양한 취향을 가진 아카데미 회원들을 공략하기 위한 '투 트랙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죠. 기술 부문과 감독상은 전자로, 각본상과 연기상은 후자로 공략하려는 영리한 포석입니다.
거장들의 귀환과 새로운 도전
이들 외에도 황금사자상을 노리는 거장들의 이름은 즐비합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파올로 소렌티노의 <은총(La grazia)>은 <그레이트 뷰티>, <핸드 오브 갓>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이탈리아 거장의 신작으로, 베니스가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한 명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강력한 후보입니다.
독립 영화의 아이콘 짐 자무쉬는 케이트 블란쳇, 아담 드라이버 등과 함께한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프랑수아 오종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각색한 <이방인(L'Étranger)>으로,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주드 로가 푸틴을 연기하는 <크렘린의 마법사>로 각각 베니스를 찾습니다.
주목해야 할 시선들
특히 주목해야 할 두 작품이 있습니다. <사울의 아들>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던 헝가리 감독 라즐로 네메스의 신작 <고아(Orphan)>는 1956년 부다페스트 봉기를 다룬 개인적인 이야기로, 또 한 번의 강렬하고 몰입감 넘치는 영화적 체험을 예고합니다.
튀니지의 여성 감독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힌드 라잡의 목소리>는 2024년 1월,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차에 갇혀 사망한 6세 소녀의 실화를 다룹니다. 적십자가 녹음한 실제 통화 기록을 영화에 사용하여 다큐멘터리적 리얼리즘과 극적 재현의 경계를 탐구할 것으로 보이며, 올해 라인업 중 가장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논쟁적인 작품이 될 전망입니다.
2025년 베니스의 지형도: 주요 트렌드 및 관전 포인트 분석
올해 베니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스트리밍 플랫폼, 특히 넷플릭스의 화려한 귀환입니다. 넷플릭스는 <프랑켄슈타인>,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제이 켈리>라는, 무게감과 화제성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3편의 작품을 경쟁부문에 포진시켰습니다. 이는 작년 영화제에서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죠. 여기에 아트하우스 전문 스트리머인 무비(Mubi) 역시 박찬욱, 짐 자무쉬, 라즐로 네메스 등 거장들의 신작 배급권을 확보하며 경쟁부문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2023년 할리우드를 휩쓴 작가 및 배우 조합의 파업 여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스튜디오들의 극장 개봉 라인업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스트리밍 플랫폼들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제작한 자체 콘텐츠들을 권위 있는 영화제에 적극적으로 출품하고 있습니다. 이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신규 구독자를 유치하는 동시에, 오스카 캠페인의 가장 효과적인 발판을 마련하려는 다목적 전략입니다. 특히 베니스를 오스카 레이스의 최전선으로 활용하려는 넷플릭스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이는 영화의 제작, 배급, 그리고 수상 전략의 중심축이 전통적인 스튜디오에서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전통적으로 '정치성'은 베를린 영화제의 고유한 특징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올해 베니스의 라인업은 베를린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의 정치적 감수성을 드러내며 '가장 정치적인 영화제'로의 변모를 꾀하고 있습니다. <힌드 라잡의 목소리>(가자 분쟁), <크렘린의 마법사>(푸틴),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지정학적 위기), 그리고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루카 구아다니노의 <애프터 더 헌트>(#MeToo)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현실 세계의 가장 첨예한 갈등과 논쟁을 스크린으로 직접 불러옵니다.
이러한 경향은 전 세계적인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더 이상 창작자들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합니다.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과 심사위원단은 이러한 흐름을 의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베니스 영화제가 단순한 예술 축제를 넘어 동시대의 가장 뜨거운 이슈에 개입하고 의제를 설정하는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함을 보여줍니다. 황금사자상의 향방 역시 이러한 정치적 맥락 속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르베라 위원장이 제시한 '괴물'이라는 테마는 올해 라인업 전체를 관통하며 2025년의 시대정신을 포착하는 핵심 키워드로 작동합니다. 이 '괴물'은 라인업 속에서 다채로운 형태로 변주된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된 괴물에서부터, <어쩔수가없다>의 경제 시스템이 낳은 괴물, <부고니아>의 음모론이라는 인식의 괴물, <크렘린의 마법사>의 정치적 괴물, 그리고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의 전쟁이라는 괴물에 이르기까지, 21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괴물'을 탐구합니다.
이는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경제적 불평등, 포스트-트루스 현상, 지정학적 갈등, 기술 발전의 윤리적 문제—를 '괴물'이라는 강력한 은유를 통해 진단하고 성찰하려는 시도입니다. 결국 제82회 베니스는 '괴물'이라는 렌즈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복잡한 병리 현상을 조망하는 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영화제가 단순한 작품의 나열을 넘어, 하나의 일관된 큐레이션 철학을 통해 시대와 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올해 베니스 경쟁부문은 한국 영화가 글로벌 영화 산업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와 한국 CJ ENM이 공동 제작한 <부고니아>의 동반 진출은 그 자체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과거 한국 영화의 해외 영화제 진출이 주로 감독 개인의 작가적 역량에 의존했다면, 이제는 산업적 역량이 결합된 형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어쩔수가없다>는 CJ ENM이 투자배급을 맡고, <기생충>과 <미나리>를 성공시킨 북미의 강력한 배급사 네온(NEON)이 배급을 맡는 등,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시스템 안에서 제작·유통되고 있습니다.
한편, <부고니아>는 한국의 독창적인 시나리오(<지구를 지켜라!>)가 세계적인 거장 감독에 의해 재창조되고, 한국의 자본이 공동제작에 핵심적인 파트너로 참여하는 성공적인 'IP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합니다. 이 두 사례는 한국 영화계가 단순히 좋은 영화를 만드는 생산 기지를 넘어, 글로벌 영화 산업의 중요한 플레이어이자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원천(IP 공급원)으로 그 위상이 격상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황금사자상의 향방과 오스카 레이스의 서막
● 1순위 그룹
○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강력한 작가주의와 장르적 쾌감, 경제적 불안이라는 시의성 높은 주제, 그리고 사회 비판적 시각을 지닌 심사위원단에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를 모두 갖췄습니다. 블랙 코미디와 스릴러를 넘나드는 탁월한 연출력이 입증된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입니다.
○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괴물'이라는 영화제의 핵심 테마를 정면으로 다루는 상징적인 작품입니다. 베니스가 사랑하는 감독이라는 점과 압도적인 기술적 성취가 예상된다는 점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가집니다.
○ <힌드 라잡의 목소리> (카우타르 벤 하니야): 올해 라인업 중 가장 강력하고 논쟁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심사위원단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면,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강력한 다크호스가 될 수 있습니다.
● 2순위 그룹
○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캐서린 비글로): 거장의 화려한 귀환이라는 상징성과 장르적 완성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정치적 긴장감과 스릴러의 조화가 심사위원단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 <부고니아> (요르고스 란티모스): 전년도 수상자의 2년 연속 수상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현재 세계 영화계에서 란티모스가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상과 작품의 독창성은 무시할 수 없는 변수입니다.
● 남우주연상 (Coppa Volpi for Best Actor)
○ 이병헌 (<어쩔수가없다>): 평범한 가장이 생존을 위해 점차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야 하는, 배우의 역량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복합적인 역할입니다. 박찬욱 감독과의 완벽한 시너지가 기대됩니다.
○ 조지 클루니 & 아담 샌들러 (<제이 켈리>): 두 배우가 빚어내는 앙상블과 페이소스 짙은 코미디 연기가 호평받을 경우, 공동 수상의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습니다.
○ 드웨인 존슨 (<더 스매싱 머신>): 기존의 액션 스타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약물 중독과 싸우는 MMA 파이터의 고통을 연기하는 파격적인 변신 그 자체로 엄청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연기력이 입증된다면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될 수 있습니다.
● 여우주연상 (Coppa Volpi for Best Actress)
○ 엠마 스톤 (<부고니아>): 현존하는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의 작업에서 늘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습니다. 외계인일지도 모르는 미스터리한 CEO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낼 것으로 보입니다.
○ 레베카 퍼거슨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극심한 압박 속에서 국가의 운명을 건 결단을 내려야 하는 강인한 여성 리더 역할입니다. 캐서린 비글로 영화 속 여성 캐릭터는 언제나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 손예진 (<어쩔수가없다>): 점차 변해가는 남편을 마주하며 혼란과 고통을 겪는 아내 역할. 박찬욱 감독이 아내의 역할을 원작보다 강화했다고 밝힌 만큼 섬세하고 입체적인 내면 연기를 선보일 것으로 기대됩니다.
베니스는 최근 몇 년간 <노매드랜드>, <셰이프 오브 워터>, <조커>, <가여운 것들> 등 수많은 오스카 수상작 및 주요 후보작을 배출하며 '킹메이커'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올해는 특히 넷플릭스와 A24(<더 스매싱 머신>) 등 오스카 캠페인에 가장 능한 배급사들이 주력 작품을 베니스에 대거 포진시킨 만큼,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제82회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 수상작은 그 즉시 2026년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의 가장 유력한 선두 주자로 부상할 것입니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은 감독상과 각종 기술 부문에서, <제이 켈리>는 각본상과 연기상 부문에서, <더 스매싱 머신>은 남우주연상 부문에서, 그리고 <어쩔수가없다>는 국제장편영화상과 감독상, 각본상 부문에서 오스카 레이스의 초기 판도를 결정지을 강력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네마의 지평을 여는 리도섬
제8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라인업은 '괴물'이라는 시의적절하고도 도발적인 테마 아래, 세계 영화계를 이끄는 거장들의 안정적인 귀환과 새로운 목소리의 과감한 도전을 절묘하게 균형 맞춘, 그야말로 인상적인 진용을 갖췄습니다.
이번 영화제는 스트리밍 플랫폼의 막강한 영향력, 현실 정치와의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영화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창작의 중심축이자 글로벌 IP의 공급원으로 진화한 K-콘텐츠의 위상 등 현대 영화 산업의 가장 중요한 변화들을 한자리에서 목격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서 기능합니다.
며칠 후 리도섬에서 울려 퍼질 수상 결과는 단순히 한 영화제의 승자를 가리는 것을 넘어, 다가올 1년간의 영화적 담론을 주도하고 기나긴 시상식 시즌의 향방을 결정짓는, 새로운 영화적 지평을 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입니다. 전 세계의 시네필들은 이제, 숨죽여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